칼빈은 『기독교 강요』 첫 문장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질문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은 단순한 신학적 퀴즈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동시에 묻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정답을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나 불과 몇 절 후, 그 동일한 베드로는 예수님께 "사탄아!"라는 책망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바로 여기에 신앙의 본질을 향한 열쇠가 숨겨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연스러웠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 이것은 충성의 언어입니다. 사랑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 속에서 사탄의 논리를 보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항변은 겉으로는 주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의 계획을 재단(裁斷)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 본문을 설교하며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악한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문제는 선한 동기로 하나님의 방법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더 위험합니다. 명백한 죄는 사람이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의(善意)로 포장된 육신의 생각은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밀어냅니다.
칼빈은 이를 인간의 sensus divinitatis(신성 의식)가 타락으로 인해 왜곡된 결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원하지만, 자신이 상상하는 방식의 하나님을 원합니다. 고난 없는 메시아, 십자가 없는 구원, 죽음 없는 영광 — 이것이 베드로가 원한 것이었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본성이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아무런 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어려운 질문 앞에 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 그런데 어떻게?
베드로는 시도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것은 공허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세 번의 부인(否認)이었습니다.
C.S. 루이스는 이 역학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자기를 더욱 의식하게 만듭니다. 자기부인은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결과입니다. 사람이 사랑에 빠질 때 자기중심성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그리스도께 사로잡힐 때 자아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잃습니다.
신앙은 내 의지와 결단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 결단의 본질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뢰일 뿐입니다. 결국 그것은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조건, 정체성은 자신의 무능에 대한 처절한 항복이었습니다. 그것은 부흥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베드로의 회복 장면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결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훈련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저 찾아오셔서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전과 달리 장담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이것이 영적 각성(覺醒)입니다.
자기부인은 자기 파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기만(self-deception)의 종료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착각이 무너질 때, 비로소 은혜가 들어설 자리가 생깁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제자도의 구조는 세 겹입니다.
첫째, 자기부인(自己否認) — 이것은 도덕적 노력의 실패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가 말했듯, 복음은 "더 잘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너는 할 수 없다"는 선언에서 시작됩니다. 자기부인은 영적 파산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파산 선언이 은혜의 문을 엽니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짐 —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고전 15:31). 이것은 감정적 표현이 아닙니다. 칼빈은 이것을 mortificatio(죽음에 넘김)라 불렀습니다. 육신의 본성은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는 그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불가역적으로 선언합니다. 이것은 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날마다의 방향입니다.
셋째, 주님을 따름 —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것이 예수님 자신이 사신 삶이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삶을 삽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imitatio Christi)은 행동의 모방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의 전환입니다. 내 목표가 아닌 하나님의 목표를 위해 사는 것, 이것이 따름의 본질입니다.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C.S. 루이스는 이 역설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안에서 완성될 수 없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열린 존재(open-ended being)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결국 여기로 귀결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르게 알 때 — 십자가의 그리스도 — 내가 누구인지가 드러납니다. 나는 스스로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역설적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사시기 때문입니다(갈 2:20).
정체성(Identity)이란 변하지 않는 본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 정체성은 우리의 노력이 만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자가가 선언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은혜" — 이것이 베드로가 붙잡은 것이었고, 이것이 우리에게도 열려 있는 문입니다.
마태복음 16:21-25 / 갈라디아서 2:20 / 고린도전서 15:31
하나님 아버지, 저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장담하면서도
세 번씩 부인했던 베드로와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나의 육신의 의지와 결심으로는 결코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이제야 처절하게 깨닫습니다.
육신의 본성은 살기를 원하고, 편안한 십자가, 고난 없는 신앙을 구합니다.
그러나 주님, 오늘도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그 음성 앞에 솔직히 엎드립니다.
제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의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이끌어 주소서.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붙잡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