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지나간 과거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이며, 오늘은 선물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시간을 통합합니다.
우리에게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을 구분하지만,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 의미가 없지요.
그는 시간의 창조자이십니다.
우리에게 영원조차도 그분에게는 오늘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실 부활과 생명을 사모합니다.
부활은 죄에 대한 최종심판입니다.
부활은 죄가 인류에게 가져온 죽음을 정복하고, 사망을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생명은 곧 하나님적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유한하던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므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제공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부활과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죽음 안에서 모든 죄가 척결되고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영원한 생명(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부활과 생명은 언제 얻게 되는가?
과거입니까? 미래입니까? 아니면 현재입니까?
사람들 대부분이 미래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50%만 맞습니다.그러면 언제 얻습니까? 부활의 신앙을 통해 우리는 미래에 주어질 부활과 생명을 현재적인 것으로 가져와 그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속상하고 아픈 마음을 토로합니다.
마르다 :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마르다의 불만이었습니다.
오빠 나사로가 병들어 있을 때 예수님이 좀더 일찍 오셨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데, 왜 이리 늦게 오셨습니까
주님은 충분히 도와 주실 수 있는데, 갈리실 수 있는데 서둘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
마르다 :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예수님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절)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르다는 나사로가 장사되어 이미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래서 '마지막날 부활에서 다시 살 것을 압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우리들의 시각에서는 마르다의 고백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불신앙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지요.
그래서 마르다는 '다시 산다'는 말씀을 단지 '마지막 날이 되면 부활한다'로 이해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여기까지입니다.
제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부활에 대한 마르다의 생각일뿐 아니라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부활에 대한 신앙이라고 볼 수 있지요.
보편적인 사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대 교회 역시 일부는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재림 때에 부활을 이야기합니다.
현대 교회가 말하는 부활신앙 이 세상에서 죽은 후에 재림 때에 주님이 오시면 다시 살 것을 믿는 것을 부활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찬송가가 그렇게 가르칩니다.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 ~, 부를 때에 잔치 참여 하겠네
사실 번역에서 문제도 있고, 교리적인 가르침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4:15~ 천사장과 호령과 나팔 소리로 주가 강림하실 때
현실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신앙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신앙입니다.
마르다가 알고 있는 부활신앙에 대한 지식
마르다가 알고 있는 부화에 대한 지식이 당장 마르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습니까?
부활을 아는 자로서 부활을 모른 자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마르다는 사람이 죽으면 마지막때 다시 산다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 곁에 계시지 않음으로 나사로가 죽었다고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 :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은 내가 부활이고 생인데, 지금 네 앞에 내가 왔다.
먼저 예수님은 <관계 = 믿음(믿는 자)>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씀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곧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하실 때에 내 안에 부활과 생명이 있다.
나는 부활 그 자체시고 생명 그 자체이다.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다면 우리는 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능력인 부활을 지금 소유한 것이다.
이 말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이, 사망이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육신은 호흡이 끊어지고 땅이 묻혀 썩을지라도 사람의 눈에는 흔적이 사라져도 예수의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죽음은 육신의 형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체는 본래 하나님이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이미 부활이고 생명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물론과 영혼이 없는 것처럼 배워왔습니다.
그래서 부활과 생명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부활과 생명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고, 예수를 모시고 살아감으로 "그의 부활과 생명"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어디서든지 그의 부활을 소유하고 누리며 다른 이에게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영 곧 성령이 와 계심으로 죽음과 사망이 우리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마르다는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누구신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오라비가 죽을 때 왜 여기 안계셔 죽게 내버려 두었느냐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아직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이 그녀 앞에 와 계셨음에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예수님을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생각보다 크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마르다야 너 아직 내가 누군지 잘 모르고 있어!
"나는 .... 이다"
이 말은 신적인 이름이다. 곧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말한다.
"나는 여호와야! 나는 하나님이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단지 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내 필요와 욕망을 이루어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내 문제에 개입하셔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 집도 주고, 높은 신분과 지위를 얻게 해 주고......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일에 자신의 권능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과심 그가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은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과연 나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무덤에 죽어 있는 나사로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없는 인간의 운명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죽은 나사로의 몸은 이미 썩은 냄새가 납니다.
이 일을 누가 피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치 잠자는 사랑스런 아기를 깨우는 엄마처럼,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부르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죽음도 사망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이 부활은 죽음과 사망을 이기는 능력이요,
이 생명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님 안에 살고 있다면 <부활>과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