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연구
1. 태어날 때부터 맹인으로 난 자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은 무엇이고, 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9:2-3)
- 왜 제자들은 맹인으로 태어난 불행을 그의 죄나 부모의 죄로 여겼는가?
- 모든 불행과 고통은 창3장에서 밝힌대로 창조주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결과가 아니던가? 그런데 이 사실을 제자들은 정말 몰랐을까?
- 아니면 당시 유대사회(랍비들 전통)의 통념이었을까?
2.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1:4, 3:16~18, 8:12, 9:5, 10장10절)
-.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사람들의 상태는 어떠했습니까?(1:5, 3:19)
- 왜 요한은 세상을 어둠으로 묘사했습니까?(1:9)
1장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 유대교/바리새인들(서기관)-율법,
- 사두개인들-제사장,
- 에세네파,
- 열심당(제롯당)/독립운동(제4의 철학) 등
- 왜 세상은 빛이 어둠에 비취되 깨닫지 못했는가?
- 세상에 생명의 빛이신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왔음에도 왜 그들은 영접(믿지않음)하지 않았는가?
- 그들의 통념, 편견(오만), 우상(idol)은 무엇이었는가?
• 종족의 우상/ 자신이 소속된 종족이나 집단의 입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 동굴의 우상/ 자산의 주관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벌 때 생기는 오류
3. 예수님께소는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이 매우 싫어하는 그들의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노동(일/치유행위)을 하시고 또 맹인에게도 노동(고침받음)을 하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왜 안식일에 치유행위를 하셨는지 확인해 봅시다.(9:6-7)
- 인간에게 일은 신성한 노동인 동시에 축복이다.
- 하나님의 일은 만물의 회복 곧 피조물을 행복과 유익을 위해 세상과 만물을 경영하시는 일을 하신다.
-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 타락이후로 아버지는 창조질서가 파괴된 세상을 회복하는 일(재창조 사역)을 위해 일해 오셨다.
- 소극적 의미 :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규정들은 일(노동) 자체를 안하는 규정들입니다.
- 그러나 적극적인 의미 : 하나님과 교제하고 연합하여 쉼을 얻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안식일 규정이 도리어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없애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아 거룩한 안식(쉼)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1).
삽바톤 sabbaton / 안식일 57번
삽바티스모스 sabbatismos / 안식할 때 1번
카타파우시스 katapausis / 안식 7번, 쉼 2번
카타파우오 katapauō / 쉼 1번, 쉼을 주다 1번
히브리서 4장 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κατάπαυσιν)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러므로”는 3장 마지막 절의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를 의미한다. 모세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안식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기업을 차지하는 것이다.(신 12:9,10).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카타레이포메네스(kataleipomanes)는 현재시제. 이것은 안식의 약속이 현재도 계속 유효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참 안식에 들어오라는 초청이며, 권고이다. 그 초청과 권고는 지금도 계속되고 진행 중임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참된 영원한 안식(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약속이 남아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게도 광야의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
우리도 그 안식에 들어가기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을까 하는 떨림이다.
히브리서 4장 3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κατάπαυσιν)에 들어 가는도다”
복음을 듣고도 화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믿고 화합하는 사람은 그 안식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들어가는도다”는 현재형으로 벌써 들어가고 현재도 들어가며 계속해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믿는 자가 들어가는 안식은 단순히 휴식(rest)이나 어떤 쉼(a rest)이 아니라 원래의 그 안식(the rest in the original)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매 세대마다 그 안식으로 초청하셨으나 오직 믿는 자만 들어갈 수 있었던 그 안식, 바울 시대에도 “들어가고(to enter)”, “들어가고 있다(are entering)”는 그 영적 안식은 어떤 안식이었는가?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창조, 바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안식을 주리라고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6일 후에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또 사람을 그와 함께 안식하도록 초청한 사실로부터 명백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들이 생명의 충만함, 완전하고 만족한 생활, 그리고 일과 휴식이 가장 적당히 조화된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실 때 의미하신 안식입니다. “네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에 굴복시키라. 그러면 그는 너에게 안식(너의 영혼을 위한 안식, 그리고 방황으로부터의 안식)을 주실 것이다.”
히 4:4~5.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κατέπαυσεν) 하였으며 또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κατάπαυσιν)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의 주제를 논의하면서 창세기 2:2의 “하나님이 제칠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라는 대표적인 안식일 구절을 인용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들어가야할 《진정한 안식의 모형》은 창조의 안식이다.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이 되어 너희로 내가 여호와 너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겔 20:20)
참된 안식은 날짜가 아니다.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 있다. 그 안식을 주시러 오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유대교의 안식일을 부러워 하지 말아라. 그들은 참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가 진정한 안식을 얻을 자들이다. 저들은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히 4:6절~8절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의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은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의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κατέπαυσεν)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순종치 않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모세는 안식을 주지 못하였지만,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불순종하던 자들처럼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면서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진정한 안식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히 4:9, “그런즉 안식(σαββατισμός)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왜 여기서만 유일하게 삽바티스모스(sabbatismos)를 썼을까? 삽바티스모스는 “안식”(카타파우시스)과는 달리 “안식(일)의 준수” 혹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안식을 힘써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
히 4:10, “이미 그의 안식(κατάπαυσιν)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즉 그리스도를 만나고 순종하여 <삽바티스모스>의 안식에 들어간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쉬신 것처럼 자기 일을 쉰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쉬셨습니까?
창세기 2:2의 일곱째날 창조를 완성하심,
아담과 하와는 아무런 일이나 노동을 하지 않음
지음받음 다음 날이니 첫날부터 안식을 누렸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쉼에 동참했다. 이것은 복음의 진수이고 참된 안식의 모형이다. 그러므로 4:10절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안식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가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 쉼을 누린다.”
히 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κατάπαυσιν)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함이라”
우히는 예수 안에서 날마다 안식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그 안식의 경험은 미래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믿는 자들이 들어가는(4:3) 현재적 경험으로 제시되며 그것은 또한 “들어가고”, “계속해서 들어가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도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지금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복음을 받았으나 불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의 전례를 밟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3장과 4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사람에게 주시고자 예비하였던 참된 안식 곧 “영원한 안식”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신약의 성도(유대-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의 안식일과 그들이 지키는 주일(일요일-주님의 부활하신 날, 주님 안에서 부활을 소망함)을 지키는 것에 대한 혼동을 말끔히 정리해 줌,
이제 참된 안식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과 순종함으로》 그가 주시는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음.
3가지를 시제로 설명함
이미 믿는 자들이 “들어갔고”
지금도 “계속 들어가고 있으며”,
“들어가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구약의 성도들에게 “가나안의 안식”처럼 우리의 참된 안식은 참된 믿음과 순종으로 얻는다. 그 영적 가나안은 그리스도께서만 주실 수 있는 안식입니다.
8. 요한계시록의 안식일
1. 주의 날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마가복음 2:28절에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약 70여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예수님의 선언이 귓가에 생생하게 맴돌았을 것입니다. 또 이때는 AD 100년경이었고, 그때는 일요일을 지키는 관습이 교회에 전혀 없을 때였습니다.
“주의 날(Lord’s day)”은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날”을 말하는 것인데, 예수님이 “어떤 날의 주인”이라고 한 것은 안식일 밖에 없습니다.
“주일” 즉 “주의 날”로 부르게 된 것은, 서기 343년 사르디카 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이며 AD 364년에 가서야 라오디게아 종교 ..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요 6:29).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오신 예수님을 환영하고 영접하며, 그분의 통치와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하나님과 관계회복이 가장 먼저 해야할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신 데는 예수는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이요,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잘 지키고 있고, 하나님과 아무런 것이 막힌 것도 없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행10;17-23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은 구원의 일을 하신다. 그 일을 하나님이 친히 하신다. 하나님의 사함늘 보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인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을 통해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 우리가 할 일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뜻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것입니다(요20:20~31).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4. 맹인을 통해 불신자가 신자로 변화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1)맹인이 예수님에 대해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지 그 발전 과정을 확인해 보십시오.
→ 9:11(예수라 하는 그 사람)
→ 9:17(선지자)
→ 9:33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 9:35-38(내가 당신을 '인자'로 믿나이다)
당시 유대교 사상 가운데 선지자와 하나님깨로서 오신 분, 인자는 어떤 인물이라고 믿었는가?
5.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듣고 그 이적을 확인하고도 왜 생각이 바뀌지 않는지 살펴 보십시오.
9:16(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
→ 9:24(죄인)
→ 9:34(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 나서)
6. 9:39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7. 본문에 비추어 9:3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시려 하는 하나님의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8. 오늘 본문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 신학적인 관점 보다는 신앙적 관점에서
설교 노트
1. 불행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관점
- 사람은 그 시대의 아들로 그 당시의 세계관(통념)에 지배를 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1) 불행에 대한 잘못된 관점 : 원인을 찾으려 함
- 책임을 전가(인과응보)
- 누구의 죄 때문인가?(9:2, 34)
- 나(우리)는 불행한 이웃을 만나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2) 불행에 대한 올바른 관점 : 예수님의 대답에서
- 주님은 왜 그렇게 대답하셨는가?(9:2-3)
- 불행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왜 어리석고 무의한 일인가?
- 불행의 원인이 죄 때문인 것은 분명한데, 원인을 찾으려는 것이 현재의 불행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
불행을 바꿀 방법은 무엇인가?
왜 그들에게 주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 하나님의 일들이 드러날 것인가?(9:3, 39)
2. 예수님을 만난(혹은 들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두 반응
1) 변화되어 가는 맹인의 말과 행동(9:11, 17, 33, 38)
2) 더욱 완고해 지는 바리새인들의 말과 행동(9:16, 24, 28-29, 34)
3. 역설 :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상반된 선포
1)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함(9:39)
- 고통이나 불행이 하나님을 찾고 의뢰하며, 마음이 가난해 진 사람
2) 보지 못하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함(9:39)
- 육신이 건강하고, 율법의 지식이 많은 지식인
- 그들은 왜 고집과 완고함을 벗지 못하는가?
(바울의 예로 ㅅ
결론 : 예수님은 모든 사건을 통해 빛이신 주님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둠에서 나와 참 빛 가운데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여 빛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