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보는 눈은
송명희 시인의 가사를 보면 세상에 보는 통념이 무엇인지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눈짓으로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
똑바로 걷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몸짓으로
똑바로 걷고 싶어요 주님 기우뚱 하긴 싫어요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 하며 외면을 하네요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당신께 드릴 것은 사모하는 이 마음뿐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울뿐인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식뿐인 세상 속에 밀알로 썩게 하소서
보통 세상이 보는 관점을 사회적 통념이라고 한다.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대하여 그 시대가 바라보는 관점.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 말하는 것처럼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세계관, 전통 등은 사람들을 옭아매 놓는다.
마치 그들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죄인으로 취급하려 한다.
아니 심지어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예수 당시의 사회적 통념,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
통념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얽어매고 활동을 제약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나에게 주셨을까?
나의 어떤 행위나 죄가 원인(因: 인할 인)이 되어 그 결과(果)로 지금의 어려운 상황이 발생(應報: 응할 응, 갚을 보)했다는 논리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맹인(盲人/시각장애인)은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을 보십시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 죄이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미 제자들조차도 은연중에 그 시대의 통념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왜 맹인으로 태어나게 했습니까?’ 라는 뉘앙스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질문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사회적 통념(通念)이 무엇이었는지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 “모든 고통의 원인은?”
원인을 찾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아라.
너희들의 생각처럼 “그런 것이 절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이 그렇게 태어나도록 하나님이 섭라하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시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소경으로 태어나도록, 이 사람이 겪을 고통을 조장하신 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들은 이미 성경을 통해 그 원인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세상에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과응보로 보고 있구나"
인간에게 고통과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모든 질병과 고통이 인류의 조상,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류에게 찾아왔습니다.
질병도 죄의 원인 중 하나입니다.
그러면 중도장애인이나 질병으로 고생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입니까?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자들에게도 발생하는 모든 질병은 죄가 원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질병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한 부분(허용)이기도 합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다.
질병에 걸린 사람, 환자나 소경처럼, 하나님은 죄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때로 질병에 걸린 것이 복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질병이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 없이 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큰 불행입니다.
그러나 질병이 걸려 복음을 듣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소식을 듣고 소망을 갖고 산다면
그 질병은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여 그에게 유익한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판단 중지가 답입니다.
그저 불쌍히 여기고 동병상련으로 위로하고 소망을 주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사람들의 판단 기준도 제각각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무자비합니다. 악합니다. 그리고 그의 상황을 죄와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결코 그러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길라잡이요. 인간의 양심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4절, '때가 낮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하실 때 창조하신 후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둘, 셋...)날이라.
낮이라는 말은 ‘빛이 있다’는 말의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창조의 일"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육체로 계시는 동안에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낮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안식일에 치유하시는 행위도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세상을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지켜야할 것들, 39가지나 됩니다.
즉,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들을 구분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안식을 여겼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보다 에세네파 사람들은 엄격하여 이러한 율법(유전)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안식일에는 치료(고침) 행위뿐만 아니라, 짐승이 구덩이에 빠진 경우조차 구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시는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는 매우 의도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유대인들과 일부러 시비(是非)를 불러일으키는 일을 하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1인 시위입니다. 선지자적 시위입니다. 이는 뒤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7절,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는 일”, “실로암(보냄을 받았다) 못에 가서 씻으라” 이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하신 일들입니다. 당시 에세네파 사람들은 사람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는 것조차 하지 말아야할 행위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던 말씀들, 그분이 행하신 행위들은 시위(示威, 위력이나 기세를 드러내어 보임)입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에세네파 사람들의 부당(不當, 이치에 맞지 않는 잘못)에 대해 항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홀로 <유대교>에 항거하고 일부러 시시비비(是是非非,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를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치유를 행하신 이유
창세기의 창조의 안식은 창조행위를 마치신 하나님께서 그의 지으신 만물로부터 찬송을 받으시는 날입니다.
사실 여섯째 날 지음받은 인간은 일곱째날, 어떠한 일도 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 밖에 없었습니다.
아담의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 안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안식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율법을 통해 ‘안식일’을 제정하여 인간에게 강제로 안식(쉼)하게 하셨습니다. 오랜 세월 인간은 일을 하면서 땅이 노동력만큼 생산물을 내지 않자 안식을 거부해왔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무조건 열심히 일을 해야만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노력은 얼마동안은 보다 많은 수확을 거두었지만,
(농약, 화학비료 등 과다사용으로) 결국 땅은 지력을 상실해 버리고 맙니다.
지력 회복의 유일한 비결은 6년에 한번씩 쉬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
하나님의 창조에로 되돌림, 하나님의 창조의 회복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는 바로 <안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안식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 만물의 통치자 되신다.
둘째는, 하나님 통치 안에 안식이 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안식이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그분의 통치 안에 머물 때에만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셋째, 이 날은 거룩(구별되게)한 안식 곧 쉼입니다.
쉼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필요한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쉼, 즉 안식은 너무나도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쉼(rest, 멈추다, 정지하다, 휴식하다)은 결코 게으름이 아닙니다.
육체의 쉼과 함께 정신적인 쉼입니다.
육체는 내일을 위한 충전의 시간이며, 정신은 일에서 벗어나 변화와 창조를 위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쉼은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안식(安息)이며, 영적인 쉼인 것입니다.
맹인에게 안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고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