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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적으로 부활과 생명은 어떤 의미인가

요한복음 11:17-30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내가 알고 있는 부활과 성경이 말씀하는 부활의 차이

부활은 사전적 의미로는, ‘죽었다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비슷한 뜻으로 復生(부생)도 있다.
그러나 한자가 만들어 지기는 復(부)는 가던 길(彳[걸을 척])을 다시 되돌아감(复·㚆[다시갈 복])에서 ‘회복하다’ ‘거듭’ ‘다시’를 뜻하게 되었다. 

가던 길을 ‘돌아오다’를 뜻할 때는 ‘복’으로 읽는다.

‘다시’를 뜻한 때는 ‘부’로 읽는다. 예)부활

우리가 쓰는 회복하다는 복을 읽는다. 

'광복( 光復)절'에 쓰인다. 빛을 다시 찾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复·㚆(복)은  '회복할 복'이라는 한자로, '회복하다'는 뜻이다.

이 글자는 ‘彳('조금걸을 척, 자축거릴 척') ’은 네거리 모양인 行(행)의 반쪽으로 ‘길’ ‘가다’를 뜻한다.

복()_ 돌아올 복, 다시 부. -. 풀무질을 하는 모습 본떠 만든 글자. (손이나 발을 움직여 바람을 일으킨다.) 

 活(활)은 물(水・氵[물 수])이 흐르다 + 입 막혀 있다가 혀가 밖으로 나오는 모양(𠯑·舌[입막을 괄])이다. 

마치 물리 가득모였다가 터진 틈으로 용솟음치며 ‘콸콸’흘러 나오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막혔던 것이 다시 터져나와 흐르는데서 ‘살다’ ‘살아나다’를 뜻한다.

위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막혔던 것이 툭 터지면서 나오는 모양, 길을 걷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모습이다. 

그러나 부활은 '다시 살아남', '어려움을 이기고 다시 일어설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부활'이란 영어로 Easter 혹은 resurrection이다. 

resurrection 은 "사라지거나 끝난 무언가를 다시 사용되거나 존재하게끔 불러오는 행위"를 의미한다. 

“surrection"은 라틴어 “resurrectio"에서 유래했으며이는 다시 일어나"라는 의미이다.

resurrect(부활시키다, 되살리다) =  [re 다시] + [sub 아래에]이다.

이처럼 부활은 무언가 사라지고 끝남에서 다시 존재하게끔 불러오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면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부활(復活)의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끝이며, 회복 불능이며,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불가능이다

그런데 거기서 다시 어떤 생명의 힘이 작용으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히브리어에는 아나스타시스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다윗은 이 말을 통하여 장차 메시아가 은사를 주실 것을 예언했었다(시 68:18). 

바울은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다윗)가 이르기를" 즉 시편 기자를 말한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예언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먼저 "그가 올라가셨다"는 말씀에 대하여 언급한다.

사도는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은 그 모습 그대로 승천하신 곳, 즉 가장 높은 하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였다.

 또한 이 말을 통하여 사도는 그가 올라가심(올리움을 받은 상태), 즉 그의 아버지에 의하여 높임을 받으시고 특별히 영광을 입으신 상태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 곧 죽음을 이기시고, 사망을 정복하셨다.

  부활하신 우리의 복된 구세주께서는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다는 완전한 증거가 된다.

 마치 적군을 물리치고 그들을 포로로 사로잡은 위대한 정복자가 노예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할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용사들에게 그리고 그의 승리를 축하하는 무리들에게 전쟁에서 승리로 얻은 전리품을 골고루 나누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같이 사단과 죄, 죽음과 사망을 정복하신 승리자이시다.

그가 하늘에 오르셨을 때 "사로잡힌 자들을 데리고 가셨다."(삿 5:12 참조).

그런데 본문에서 사로잡음은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았던 모든 영적인 적들을 사로잡음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우리를 죄의 권세 아래로 이끌고 갔던 사탄과 죄와 사망과 죽음을 사로잡으셨다.

즉 죄와 사탄과 죽음 같은 것들을 정복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십자가 위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셨다.

그러나 그 승리의 결과는 이제 하늘로 승천하셔서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를 위임받는 대관식으로 완성된다.

 그가 이제는 만유의 주가 되시고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그의 손 안에 쥐고 계시며,

우주 통치대권을 그가 임의 대로 휘두르시는 능력을 위임받으셨다.

이로써 그의 승리는 완성되었고 이제 그와 함께한 자들에게 선물을 주시는 일이 남아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대관식을 통해 위임받으시고, 이제느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

 "그가 선물을 인간을 위해서 받으셨다"(역주: 한글 개역과 틀림, 한글 개역은 선물을 인간에게서 받으셨다로 되어 있음).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의 부활은 단지 "죽음에서 살아남" 정도가 아니다. 

사망의 권세를 정복하고 전리품을 갖고 아버지 앞에 가셔서 통치의 대권을 위임받으시고

그를 따르던 자들에게 선물(성령)을 주시는 것까지를 부활로 보았던 것이다. 

 

그가 누구이기에 다시 살아나고 하늘로 올리워 지는 존재란 말인가?

 

이는  다시 살아나심과 올리워지심’인데, 이는 그리스도가 이미 천상의 존재였음을 전재로 한다.

그렇다. 그는 하늘 곧 천상의 존재이셨다.

그는 하나님이셨고,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그 권능과 영광이 동일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사망에게 자신을 넘겨 주었으나 사망은 그를 가두어 둘 수 없었다.

그는 사망을 이기는 권세가 있는 분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일도 불가능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무엇인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자만이 다시 하늘에 올라간다. 

하늘에서 내려오심, 무덤에 내려가심, 죽음을 이기심, 사망을 정복하심, 사망의 권세를 없이하심을 전리품으로 얻으시고 

하늘에 오르신다. 그리고 사망을 이기는 영원한 생명의 능력과 권세를 그를 믿는 자들에게 선물로 주신다. 

이것이 <부활이요 생명>이다. 승리자이신 그리스도가 부활과 생명을 선물로 주셔서

그 선물을 받는 자들에게는 다시는 사망이나 눈물이나 고통이나 이별이 없다. . 

이것이 부홛과 생명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러나 유대교신학에서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없다하였고, 바리새인들은 메시아가 가져오는 선물이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날에 부활이 있는 것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교의 이런 신학을 무너뜨리신다. 

그들이 가르친 신학에는 원래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전달하지 못하는 소경과 같았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었다. 

이것이 부활이다. 그 부활은 예수 안에 있다.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요 3:13)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빵, 양식)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이다.”(요한복음 6:51)

내려오셨다함은 그가 하늘에 올라갈 권세도 있으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구약이 말씀하고 있는, 다윗이 예언했던 '그 부활'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2)

  • 이사야 25:6-8
  • 에스겔 37:1-10
  • 다니엘 12:2

호세아의 예언은 속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의 강조이다. 

<일으키신다. 살리신다, 살리라>는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자들을 여호와께서 살리시며, 일으키시며, 살게 하신다.  

 

부활,  헬라어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

독일어로는 부활하다는 단어를 auferstehen(아우프에어스테엔)

 "아나 (ἀνά) "( 위로, 위를 향하여)와 '히스테미'('서다, 이룩하다, 두다, 세우다, 옆이나 가까이 서다, 확고한 마음을 가지다, 권리를 포기하지 않다') * 타동사(일으키다; 행 2,24, 32; 3:26; 13:33~34; 17:31)로 쓰임

이 단어는 이미 끝남, 완결된 상태에서 다시 살려내어 시작하는 것

  - 예를들어 정해진 것들이 <모두 끝났다. 종료되었다. 그런데 완전히 다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바울은 아직 신약성경(복음서)이 쓰여지지 않았던 때에 이같이 말했다.

“(구약)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구약)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전 15:3~4)

구약시시대에 믿음의 선진들에게도 부활의 신앙이 있었다. 

칠십인경 시편 65편 1절, 예레미야애가 3장 63절, 다니엘 11장 20절, 스바냐 3장 8절,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것과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히 11:18~19)

시편 16편 10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눅 24:25~27)하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이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이미 위에서 설명했던 다윗의 메시아 예언에 관한 것이다. 

 

생명(조에, 비오스, 프쉬케) 

신약성경에서 생명을 의미하는 단어로 '조에'(zoe), '비오스'(bios), '프쉬케'(psyche)가 사용

흔히 ‘생명’이라고 번역된 한국어 성경의 헬라어는 적어도 세 가지의 다른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헬라어로 사용되었는가를 잘 알아보고 해석하는 매우 중요합니다.

 

1. 프쉬케(ψυχη) = 우리 말 ‘혼’, ‘삶’, ‘생명’, ‘목숨’으로 번역되는 단어.

우리 말로 혼이라고 번역한 대부분의 경우는 이 단어 프쉬케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이 땅에서의 삶, 생명, 목숨’으로 더 많이 사용(마 2:20, 롬 11:3, 마 20:28, 막 10:45 등)

 눅 12:19-20절에서 “영혼”이라고 번역, 이 단어로서 ‘영혼’으로는 번역되어서는 안된다.

‘생명, 목숨’으로 번역함이 적절하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19-21) 세 번 모두 ‘영혼’이 아니라 ‘목숨, 생명’으로 번역해야 옳다.

 ‘혼’이라함은 ‘인간 생명의 내면의 자리와 중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종 ‘사람’ 을 의미하기도 한다.

막 3:4, 눅 6:9절,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사람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으로 번역함이 옳다.

 

2. βιος(생명)

 흔히 bio/tic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을 의미한다.

그 생명을 유지하는 활동과 자원을 의미하는 측면이 강하다.

눅 8:14절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의 비유에서 “이생의 염려”로 번역되었다.

막 12:44, 눅 8:43(아무에게도), 15:12(재산, 소유, property),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

 

3. ζωη(생명) = 히브리식으로는 '오는 세상에서의 생명'이다. 그래서 부활과 영생이 먼 미래의 일이 되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현재로 가져오셨다. 예수님 안에 그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현재의 것으로 소유하고 맛보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현재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다. 

 

 이 단어는 bios와 같이 인간의 <생명>으로 많이 사용하지만, 신앙적인 면에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할 때는 항상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만이 ‘생명, 영생’으로 사용된다. 

 1) 물리적, 신체적 의미에서 인간의 ‘생명’을 의미 (롬 8:38, 고전 3:22, 고후 5:4, 눅 12:15, 16:25, 행전 8:33 )  

    요한서신에서 거의 다 “영원한 생명”을 말할 때 사용(요 5:26, 6:35, 12:50, 요일 1:1, 5:20, 롬 6:4, 엡 4:18, 등)

  2) 요한과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 즉 영원한 생명"을 말할 때 항상 이 단어로 썼다.

    이 단어는 ‘영원한’ (αιωνιος)과 연결하여 사용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절 "영생" 

   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과 은혜로 주시는 생명이다.

   당신의 거룩의 생명을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주시는 위대한 선물이다.

   이 생명을 얻는 것이 구원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 생명은 반드시 그리스소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주신다.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때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주시는 특별한 은혜의 선물이다.

  이 생명은 참된 생명과 풍성한 삶을 제공한다. 

 이 ζωη가 이 세상에서의 단순한 생명과 삶의 존재를 의미하는 βιος과 엄격하게 구별된다. 

  이 땅에 나그네처럼 잠깐 사는 생명이 아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 하나님적 생명으로 

 이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인하여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