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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랑과 나사로의 실존

들어가면서

오늘도 우리의 복음, 우리의 전부되시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요한이 전해주는 복음서를 통해 <세상에 생명과 빛을 주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 가고 있습니다. 

요한은 앞에서 6가지의 표적들을 행하신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독자들 곧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믿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이심>을 믿어야합니까? 

 요20:31에서 이 책을 기록 목적을 밝힌대로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과 너희로 그를 믿고 그 이름을 힘임어 생명을 얻게하려 함이라"입니다. 

 특별히 오늘 요한복음 11장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부활사건' 과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며 제자들과 무리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신 가장 결정적 표적사건이며, 이로써 자신이 <부활과 생명> 그 자체이심을 확증하셨습니다.

 

1. 나사로(Λάζαρος)의 죽음과 인간 실존 

아마도 예수님께서 요단강 동편 살렘 근처의 베다니(세례베푸시던 곳)에 계셨던 것을 추정되고, 그곳으로부터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 동쪽 언덕 아래에 있는 나사로가 살고 있던 베다니 마을까지는 직선거리로 28km이지만, 실제로는 32km 그 이상의 거리로 예루살렘까지는 계속해서 올라가는 오르막길입니다. 

 낮은 저지대인 요단강(-400m) 근처에서 고지대(+800m)에 있는 베다니 마을까지 예수님과 제자들이 걸어서 이동했다면  한 낮에 걷는 것만으로는 하루의 시간으로는 부족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지상생애와 사역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와 동행하고 계신다.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요,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시간표를 따라 사셨습니다.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렇게 말씀하심은 예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것 곧 그의 부활을 예고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다.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그의 죽음을 선언하셨다.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 죽었느니라

예수님은 왜 나사로의 죽음을 잠들었다하시고, 그를 살라는 것을 깨우러 가신다고 표현하셨을까? 

 

나사로는 헬라식 표현이고, 히브리식 표현은 엘리에셀(אֱלִיעֶזֶר , 도우시는 하나님)(창15:2)이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친구라고 부르셨고, 또 매우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놀라운 이름을 가졌어도 그는 갑작스럽게 병들었고 황망하게 죽었습니다. 

 

1-1. 나사로(Λάζαρος)와 인간실존

나사로는 누구입니까? 믿는 자들,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모두입니다. 

나사로는 아담의 후손으로 살아가는 인간 실존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첫째,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고 없이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불청객이다. 

 둘째, 죽음이라는 불청객은 대상(신자든, 불신자든)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찾아온다. 

 셋째, 예수를 믿는 자들은 죽음을 지나친 슬픔과 애통, 절망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넷째,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 안에서 부활과 생명의 소망을 가져야 한다.

 

1-2. 잠과 죽음

우리들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는 죽은 자를 살리는 것도 잠자는 것을 깨우는 것과 같이 쉬운 일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 장례행렬을 멈추시고 청년을 살리실 때도 마치 잠자는 자를 깨우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다. 나사로에게도 '나사로야 나오라.' 마치 아이를 잠에서 깨우듯 살리셨다. 

막5:36, 달리다쿰(Ταλιθα κουμ, Talitha kum)  아람어 "작은 소녀야"(호격), 쿰은 '일어나라'는 명령어이다.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요11: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2. 절망, 죽음에 이르는 병

2-1.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죽음 앞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사랑하던 사람(배우자나 자식)이 떠나는 것이다.

예수님도 나사로를 친구(friend)라고 부르셨다. 그의 가족을 매우 아끼며 사랑하시던 예수님,

당장 그를 고치실 능력이 있으시면서도 예수님은 그 권능을 어떤 목적을 위해 보류하셨다.

지금 당장 고쳐주고 살려주는 것보다 그의 죽음을 통해 보여줄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 그리고 그 날 장례를 치뤄졌다.  

예수께서 지체 없이 출발했어도 나사로가 죽은 후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장례되어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 지났다(요 11:17).

나사로는 동굴로 된 무덤에 장레가 되어 있었고, 이미 몸에서 썩어 냄새가 났다. 

나흘 뒤 예수님이 도착하였을 때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나사로의 두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롯한 문상 온 유대인들은 한없는 슬픔에 빠져 있었다.

 참 안됐어! 너무도 아쉽다. 한창 나이에, 아직 젊은데, 꽃이 피기도 전에... 여동생들은 어떻게 살지.... 

그들도 예수님을 향해 원망섞인 말로 한탄한다.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을 말하며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하실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셔서 우셨다. 

이 세상은 이처럼 죽음 앞에 절망한다.

이제는 인간 나사로는 생물학적으로  더 이상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어떤 희망도 없는 상태 곧 절망이었다. 

죄렌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불신앙은 절망 그 자체이며, 그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세상은 죽음과 사망 앞에서 절망하지만,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자신 안에 '부활과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의 슬픔과 괴로움이 함께 하는 최상의 고통중 하나이다.  

또 인간에게 가장 많은 후회를 남기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2-2. 주님께서 물으심

바로 그 때 에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물으셨다. 우리 모두에게 물으신다.

이제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3. 나사로를 살리심과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 

예수님은 자신이 지체하며 이틀을 더 머무신 이유와 목적에 대해, 이제 나사로를 통해 드러내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앞에서 나면서부터 소경(맹인)이었던 사람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일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일이며,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로 하여금 믿게하려 함이라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목적과 그로 인하여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16 디두모(헬라어)라고도 하는 도마(아람어)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도마는 무슨 생각으로 이 말을 했을까? 정말로 주님과 함게 순교하러 가자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예수님께 자신에게 주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말이었을까? 

아니면 얼떨결에 내뱉은 뜬금없는 말일까? 좀 특이하고 어뚱한 면이 있어 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마의 고백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싶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려고 하십니까?” (11:8, )

다른 제자들은 반대하였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마는 아직은 설익은 믿음과 고백일지 모르나 나름 주님의 단호하신 모습에 동참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당장 눈 앞에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린 마음에 해 본 말일까?

아니다. 실제이다. 예수님도 가신다면 나도 갈 것이다. 우리 함께 가자!

믿음을 떠나서 도마의 말은 '의리와 충정의 마음'에서였다. 

우리도 그렇지 아니한가.....

이처럼 육신적인 사랑은 늘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사랑은 무엇일까? 

 

육신적인 사랑은 유한하다는 한계와 함께 영원할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랑을 갖고 계시다. 

인간적으로 예수님이 빨리 오시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할 수 있다.

아직 예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을 알면 기뻐할 수 있다. 그를 믿으면 기쁨이 충만해 진다.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사랑은 육적 필요를 채워주는 일도 사랑이지만, 유한하고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영적 필요를 채워주는 예수님의 사랑은 육적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하고 크고 영원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사랑에 잇대어 살자.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함께 살리라.

 

 

 

 

결론

잔치집에 포도주가 없을 때 포도주가 되게하여 채워주심도 큰 기쁨이고 놀라운 사랑의 행위이다.

또 우리의 질병이 고침받고 건강해 지는 것도 기쁨이고, 고통스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 

배불리 먹여주심도 기쁨이고 사랑의 표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육신을 위한 것이며 그 기쁨은 잠시 뿐입니다.

표적은 잠시이고,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영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자신을 아는 것은 영원한 기쁨이고, 영원한 행복입니다.

그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놀라운 기쁨이 되지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주게 영광 할렐루야 주만 찬양해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그 놀라운 기쁨,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맛보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1.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부활과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심이 우리에게 가장 큰 사랑이지요.  
2.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심과 믿게하여 주심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3. 예수 안에는 영원한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갖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 해 주심이 가장 큰 사랑이고, 

4. 예수를 믿어 장래의 부활과 함께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에 매일매일 내 안에 예수 생명을 소유하고 고백하고 살게 해 주신 믿음을 주심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