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은 예수께서 행하신 여섯째 표적으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반부는 예수께서 맹인에게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실로암 못으로 보냈을 때 실로암에서 씻고 육신의 눈을 뜨게 된 후, 유대인들과 안식일 치유 논쟁과 맹인이 예수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영적 눈이 뜨이고, 참 빛을 주시는 주님께 경배하였을 때 또 다시 진짜 소경이 누군가에 대한 논쟁으로 후반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본문 전체를 중심으로 이처럼 유대교에서 배척받던 육적 맹인이었던 사람이 영적으로 변화와 함께 참된 신자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 진짜 맹인인가?
만물의 척도
고대철학자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매우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혹은 그가 속한 사회, 민족의 경험과 문화, 전통과 문명 등을 통해 알고 습득한 지적 경험들을 가지고 그가 살아가며 세상에 보이는 것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심지어 정죄하는 잣대로 사용합니다.
아는 것이 힘
또 한 사람,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est potentia)라는 명언을 남긴 근대철학의 길을 열어 놓은 프란시스 베이컨입니다. 그는 인간은 네 개의 굴레 곧 " 종족의 우상, 극장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등이 형성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생겨나고 학습되어 굳어진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결국엔 그 사람은 그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평가하므로 심각한 왜곡과 오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함들은 자신의 경험하는 안에서 생각이나 판단, 평가가 옳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를 거부합니다.
어떤 애들은 자신의 결정이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고려해 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진실은 그들의 눈에 가려지고 맙니다.
이 이야기는 특히 요한복음 6,7,8,9장의 유대인들에 관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율법적 지식으로 예수를 바라봄으로 영적 맹인들이 되어 예수를 정죄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는 것조차 율법을 위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에메트)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나의 이야기를 통해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를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저는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낮이 무엇인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둠과 밤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심지어 아버지 어머니 얼굴도 모릅니다. 목소리로 압니다. 시력이 없어 청력이 발달되어 귀가 눈의 약할을 합니다.
나는 소경으로 태어나 정상적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저주받은 사람으로 낙인되어 늘 무시를 당하였고, 가족들조차도 천덕꾸러기로 여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길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동냥하는 하는 법을 익혀야 했습니다.
매일 매일 수도 없는 사람들에게 비난과 모욕을 들으면서도 냄새나는 거지 옷을 입고 나를 데려다 주는 곳에 앉아 구걸해야만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귀는 밝아 저 멀리서 나는 소리까지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또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 사람의 감정을 잘 알 수도 있습니다. 그날도 큰 기대없이 여느 날처럼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거기서 적어도 그날 먹을 빵을 살 수 있는 동전을 동냥한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나에게는 이헌 노래가 가장 잘 어울립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 가야하는 고달픈 인생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날도 나는 동일한 장소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초막절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여리고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오는지 그 광경을 벌 수 있다면 얼마나 장관이었을까요.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예배하러 갈 때 찬송하였던 노래들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총 15편을 노래하며 여리고로부터 올라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찬송 소리는 하늘을 가득 매우고, 기드론골짜기와 힌놈의 골짜기를 따라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초막절 마지막 날 밤이면 큰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나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삼삼오오, 가족들과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동전이라도 던져주면 몇 개만 남기고 얼른 호주머니에 넣곤 했습니다.
늘상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비난받고, 같은 거지들에게 얻어맞기도 하고, 구걸한 동전을 빼앗기는 것도 일쑤입니다.
그들은 나보다 덜 불행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내 가슴의 노트에 기록이 되듯이 오랫동안 기억을 하게 된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얼마전 예루살렘 성 안 솔로몬 행각이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던 38년된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날도 <안식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예수라는 분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병자들이 가득 그곳에 찾아와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 5:6)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요 5:8)
이 말씀하실 때 그는 즉시로 일어나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38년동안 한번고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 그가 누워있던 침상을 들고 걸어갔다고 하는데...
안식일에 고침받은 것보다 치유하는 행위를 했다고 그를 비난하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지 않는 그는 죄인이라고 말하더군요.
이 소문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구걸하던 나도 여러 번 들었으니까요.
"기적은 일어날 수 있구나."
하지만, 그 분은 도대체 누구신데 병자를 고치는 능력이 있는지.
맹인으로 태어난 나도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분을 만날 수 있다면?
아니 그분이 찾아 오신다면 모를까.
나에게도 희미하더라도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지금까지 맹인이 눈을 떴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리고에서 사람들이 올라오면서 길가에서 동냥하던 나에게 말했습니다.
"야, 맹인아! 너도 들어봤니?"
"저 아래 여리고에 사는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가 눈을 떴어."
"너도 기다려 봐.
혹시 너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라며 비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놀라운 소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막 10장 46~52절).
바디매오, 그 역시 소경이며 여리고의 거지였다고 합니다(눅18:35).
이러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간절해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찾아와 주는 기적,
나를 만나주시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정말 나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소경인 나는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는 것도 허락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몇일전 초막절 절기에 찬양 소리는 성전산과 맞은편 감람산에 울려 퍼졌습니다.
예루살렘의 가득한 수많은 인파가 환호성을 지르는 소리에 내 가슴도 울렁거렸습니다.
제사장의 무리가 금주전자를 가지고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서 좌우로 그들이 올라가는 길 양쪽에서 환호합니다.
찬양을 부릅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물을 부을 때 일제히
"여호와는 나의 생수이다."라고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리고 성전 높은 곳에 불이 밝혀지고 네 귀퉁이에 빛을 붙이며
"여호와는 나의 빛이시다."라고 외칩니다.
그들의 외치는 함성 소리 가슴은 뜨거워집니다.
비록 지금은 소경으로 태어났어도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고백은 나도 드릴 수 있으니까요.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모세와 함께 나와서 광야를 지날 때 불기둥으로 비추어 주신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아마도 그 때 애굽에서 니온 사람 중에도 나와 같은 소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은 나와같은 소경조차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라고 하는데...
니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태오나기전에 죄가 있었는지. 부모님의 죄 때문에 내가 맹인으로 태어났는지.
이런 나에게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이 있을까요.
그런데 그 날도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웅성거리며 들렸습니다.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소리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나에게 동전을 줄까? 내심 궁금해 하며 열심히 구걸을 합니다.
"나는 맹인입니다.
불쌍한 저에게 한 푼만 도와 주신다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무리들이 멈추고, 무언가 이야기를 합니다.
......
제자들과 한 랍비가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랍비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빛이로라."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매우 인자하시고 온화한 목소리였습니다.
이 말씀하시고는 잠시 후 침을 땅에 뱉으시고는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가까이 계셨던지 그가 내 눈에 진흙을 바를 때에 나는 그 분의 숨 소리, 심장 소리까지 들리는듯 했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이런 일은 나에게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말씀하신 '실로암' 못으로 향했습니다.
맹인인 저를 그곳으로 데려다 줄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같이 동냥을 어린 거지 친구가 나를 돕겠다고 함께 가 주었습니다.
실로암 못으로 향해 갈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셨지,
'가서 씻으면 눈이 떠진다.
완전히 보게 될 것이다'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묵직하게 들려오던 그분의 목소리는 지금 내 가슴엔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이 말씀한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내뱉으며 한걸음, 한걸음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실로암으로 향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매일마다 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입니다.
사람들은 나같은 냄새나는 거지 소경을 반가워 해 주지 않습니다.
다들 피해갑니다.
실로암 연못은 먹은 물이기도 하고, 순례자들이 씻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초막절 축제 기간 끝이라서(요한 7장-8장- 9:7, 11) 남아있는 사람들, 안식일을 지키며 예배하는 무리로 가득합니다.
내가 찾아간 실로암에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나는 적당한 곳으로 인도되었고 내 눈을 씻기 시작했습니다.
내 눈에 발라졌던 진흙들이 씻겨 나가고.
물로 여러 번 내 눈을 씻었습니다.
무언가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씻고 또 씻으니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놀라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나는 환호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내 눈이,
오! 내 눈이 떠졌다."
"보인다 보여!
이젠 나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오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정말 그 길가에서 구걸하던 맹인 정말 맞습니까?
어떤 이는 거짓말, 비슷하지 그 사람은 아니냐.
지금 내가 가야할 곳은 어디일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왜 나는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실 때 그분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왜 묻지 않았을까.
후회가 됩니다.
내가 눈을 뜬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니까요.
그분이 선지자가 아니면 그런 일은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물어볼 필요도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분을 찾기로 했습니다.
분명 그분은 하나님기로부터 오신 분이 분명합니다.
아직 나는 그분께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게와 어떻게 해서 보게 되었냐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곤란한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는 일, 바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
본문에서 개혁주의 구원서정과 비교
맹인되었던 사람이 고침을 받고 예수님에 대해 《누구》라고 말하고 있는지 그 발전 과정을 확인해 보십시오.
1. 요9:11(예수라 하는 그 사람)
소경으로 살다가 눈을 뜨게 해 주었던 그 분에 대한 사람의 이해한 예수, 그는 아직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였고, 자신에게 어떻게 눈을 떴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으로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었다.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2. 요9:17(선지자)
자신의 경험으로 창세로부터 눈을 뜨게 했던 그 누구도 없었다. 죽은 자를 살렸던 선지자들, 엘리야와 엘리사보다 더 크신 선지자이다.
예수님도 위대한 치유행위를 한 것으로 보아 선지자 중 한분으로 인식되었다.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3. 요9:33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니고데모처럼, 요3: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매우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신 분
요9: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4. 요9:35-38(내가 당신을 '인자'로 믿나이다)
35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인자'에 대한 사상은 어떠했을까?
공관복음에 '인자'는 총74회, 그중 변형으로 37회,
마태복음124회 - 구약성취, 마가복음70회, 누가복음 109회, 그러나 요한은 매우 적은 17회가 나온다.
대부분이 모형론인데,
요 1:51 야곱의 사다리,
요3:14 광야의 놋뱀 모세와 비교 ,
요 4:5~6야곱의 우물 ,야곱보다 큼(12절),
요5:45 모세 예수의 증인,
6장 빵과 만나와 예수 자신, 6:31-시78:24(인용?) '먹다'가 절의 맨 앞에 등장, 요 8:56 아브라함이 예수가 오실 날을 보며 기뻐함. 아브라함보다 이전에 존재,
6:14, 7:40 약속된 예언자
전체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 영광, 선재,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요한을 설명한다.
계1:13, 14:13
인자에 대한 3가지
1)심판자, 5:21, 26-27
- 9:35 인자를 믿느냐
- 심판은 예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동시에 심판하는 능력을 말한다.
- 기적을 보고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죄인으로 몰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에 의해 심판받게 된다.
- 39절에 자신이 심판자이심을 밝히심
- 5장과 9장은 심판자이심을 드러내심
* 안식일 논쟁과 비교해 보라
2.계시자, 1:51, 12:32
- 하나님을 드러내어 보이고 자신을 계시하며
자신을 믿는 자는 자신의 영광 안에로 데려 가심
- 하나님에게서 나오셨고, 아버지와 교통하시며, 아버지와 함께 계신 자.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아버지와 일치하신 분임
- 마14:62 참조
3. 하늘로 높임받으셔야 할 분 3:13-14
-. 내려옴과 올라감(들림받음) : 세상을 구원함
요1:18 아버지의 품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심(세상에 내려 오심)
요 14: 9 예수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임
-. 오신 목적 : 보냄의 법칙 - 요3:16
-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내어주심(보냄) + 세상에 오신 아들 + 우리의 구원(유익을 위해)* 멸망치 않게 하려고
-. 들리움 :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아버지의 계시자요, 심판자요, 영광받으실 자임을 증거하고 확증하여 알리심, 들리움은 곧 영광을 얻으심
- 이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자신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심
-. 인자와 영광 8:28, 12:23, 34,
12:20-36 핵심은 영광과 들어 올려짐 = 그러므로써 신적 영광을 입으심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이사야 52:13 고난받는 종
요13:31 그리스도의 고난(죽음)은 수난이 아니라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임 (본질을 드러내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사건)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인자사상의 구약적 배경
1)인자(단7:13) - 신적 존재로서 사람의 형상을 가지신 이
2)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이 선지자 에스겔을 부르실 때
- 연약한 인간을 지칭하심
-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예언자 에스겔을 93번이나 “인자”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의 신이 사람 에게 임재할 때에만 사람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들을 할 수 있다
3)잠8:31, 인격화한 하나님의 지혜임
- 당시 유대교의 지혜전승과 묵시문학에도 나타남 : 하나님의 대리자
당시 유대교 사상 가운데 '선지자와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 인자'는 어떤 인물이라고 믿었는가?
5.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듣고 그 이적을 확인하고도 왜 생각이 바뀌지 않는지 살펴 보십시오.
9:16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
9:24 죄인
9:34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 나서 ... 가르치려 하느냐
6. 9:39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유대신학(미드라쉬)으로 예수를 심판하려 함 = 한마디로 '너는 죄인, 죽임을 당해 마땅하다'고 여김
그러나 정작 심판받아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세상의 구원하려고 보낸 아들 곧 아버지가 보낸 나를 믿지 않는 너희를 내가 심판할 것이다.
내가 바로 세상의 심판자이다.
내가 생명얻는 빛을 주러 왔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7. 본문에 비추어 9:3에서 "하나님이 나타내시려 하는 하나님의 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일은 마땅히 멸망받은 세상에 '아들을 보내어 구원, 생명주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냐신 자를 믿는 것이다.
요6장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우리 관점에서 볼 때는 분명 육신의 소경은 거지였고 불행(불쌍한 존재)하게 태어났던 그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눈을 뜬 이후 예수님을 찾아가면서 깨달아가게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를 모르는 것은 아니나 예수를 믿는 것에서는 알가는 만큼 믿음도 성장해 간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들(진정한 소경)을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은혜에로 초청하시고 계신다.
먼저는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기를 원하신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20:31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요17:3)을 깨달아 가기를 원하신다.
8. 오늘 본문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봅시다.
- 신학적인 관점 보다는 신앙적 관점에서
설교 노트
1. 불행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관점
- 그 시대의 사람은 그 시대의 아들로 불린다.
- 그 당시의 세계관(통념)에 지배를 받는다. 그 이유는 무어라고 생각하는가?
1) 불행에 대한 잘못된 관점
- 원인을 찾으려 함
- 책임을 전가(인과응보)
- 누구의 죄 때문인가?(9:2, 34)
- 나(우리)는 불행한 이웃을 만나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 온갖 모든 불행의 원인은 '하나님 없음'이다.
2) 불행에 대한 올바른 관점
예수님의 대답에서
- 주님은 왜 그렇게 대답하셨는가?(9:2-3)
- 불행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왜 어리석고 무의한 일인가?
- 불행의 원인이 죄 때문인 것은 분명한데, 원인을 찾으려는 것이 현재의 불행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기
세성의 관점 vs 하나님의 관점
불행을 바꿀 방법은 무엇인가?
왜 그들에게 주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가?
-. 왜 불행이 하나님의 일들이 드러나는 계기가 될 수 있는가(9:3, 39)
2. 예수님을 만난(혹은 들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두 반응
1) 변화되어 가는 맹인의 말과 행동(9:11, 17, 33, 38)
2) 더욱 완고해 지는 바리새인들의 말과 행동(9:16, 24, 28-29, 34)
- 세상을 누구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 인간이 해석한 율법적 관점인가? 하나님의 관점인가?
3. 역설 : 두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상반된 선포
1)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함(9:39)
- 고통이나 불행이 하나님을 찾고 의뢰하며, 마음이 가난해 진 사람
2) 보지 못하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함(9:39)
- 육신이 건강하고, 율법의 지식이 많은 지식인
- 그들은 왜 고집과 완고함을 벗지 못하는가?
(바울의 예로 들어 보라)
- 요한은 본문에서 대칭적 구조를 통해 역설을 보여 준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러하다. 역전될 수 있다. 우리도 그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결론 :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모든 행위들(사건)에늨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시는 일을 하시고 계신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회복시켜 가는 과정을 통해 요한의 공동체와 요한복음 독자들에게 "너희도 예수를 알지 못하면 소경이다."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다. 예수 자신이 세상에 생명의 빛을 주러 오신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다. 모두가 소경처럼 주님을 찾고, 알고, 깨닫고,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영적 소경이던 우리들이 이 세상에 통념[인간의 관점]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그 어둠(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에서 나와 참 빛 가운데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독자들 모두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여 생명 빛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께 절하고 경배하고 높이는 믿음의 사람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