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일러준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비유(比喩, figure)
'알레고리'(allegory)와 긴밀한 관련이 있지만 비유는 일상적인 것,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통하여 전혀 알려지지 않은 다른 것을 이해하도록 돕는 표현
두 가지 사물을 직접 비교하는 유형의 수사법 입니다. 비유는 종종 은유와 대조되는데,
비유는 반드시 "like", "as"와 같은 단어를 사용
비유( παραβολη, 파라볼레)는 "사물을 나란히 놓는다, 옆에 놓는다" 뜻으로,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것을 옆에 놓고 비교하여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방법
먼저는 비유(比喩·譬喩, figures of speech)이다.
비유란 빗대어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직접 드러내지 않으면서 어떤 비슷한 것이나 닮은 꼴, 유사한 상황이나 기능, 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비유이다.
비유의 종류에는 직유, 은유, 풍유(우화, 알레고리), 잠언, 예화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세부적인 종류를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비유의 종류를 분류하고 어디에 속하는지 분석하는 문제는 학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씨 뿌리는 이야기, 밭을 갈다가 숨겨진 보화를 우연히 발견하는 이야기, 돈과 관련된 이야기,
장사를 하는 것, 양치는 이야기, 포도원이나 무화과 농장과 관련된 이야기, 주인과 종, 임금과 신하,
혼인잔치 이야기... 등과 같은 알기 쉬운 이야기를 통하여 최대한 가깝게 <하나님 나라>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예수의 비유이다.
예수께서 하시고자 했던 그 의미를 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의 말이나 문자속의 참뜻을 알아차리라.
이것이 예수가 되풀이 하여 강조하는 말이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내가 비유로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말고 잘 알아들으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비유(譬喩)가 없다.
대신에 <생수, 생명의 떡, 참 포도나무, 선한 목자> 등과 같은 상징어들을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구별된다.
물론 요한복음에 비유(譬喩)와 유사한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 10장 6절에 보면 비유(比喩)란 단어가 나온다. 그런데 이 둘은 원어상으로는 구별된다.
공관복음에 나오는 비유(譬喩)는 희랍어로 ‘파라볼레’를 쓴 반면,
요한복음 10장 6절의 비유는 ‘파로이미아’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16장 25절과 29절에서는 비사(比辭)번역하였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숨겨진 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5 @=#5₩=
‘파라볼레’ vs ‘파로이미아’
‘파라볼레’란 단어는 넓은 의미로는 ‘짝을 이루는 모형, 유형, 상징’을 뜻한다.
이것은 구약의 성막과 같다.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하늘의 식양>을 따라 축소(모)형으로 만든 것이 성막이다.
이처럼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고 하나님과 사귐(교제, 연합)을 보여주는 아주 훌륭한 모형이다.
신약의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가르친 말씀들의 고유한 형태인 ‘비유’를 가리킨다.
이에 비해 ‘파로이미아’는 원래 ‘격언, 잠언’(Sprichwort)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쓰였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사도요한은 ‘숨겨진 말’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은 천기누설이다. 그런데 알아 들을 자는 알아 듣고, 모를 자는 아무리 설명해도 모른다.
숨겨진 말이란 공개된 비밀이다.
비밀이라는 말은 숨겨진 것이라는 말인데, 공개되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러면 공개되었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에게는 비밀이고 풀 수 없다.
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어찌(어떻게), 우리도 이런 말씀을 들으면 어리둥절하다. 이것이 땅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비밀이 담긴 이야기이며, 신비이기 때문이다.
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니고데모에게 선생이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영적으로는 '어둠, 눈멈, 무지' 속에 있었구나.
그러니 너의 그동안 가르침들은 소경이 소경을 이끄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었겠느냐
사실, 이스라엘의 스승이던 랍비 니고데모도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같이 말씀하신다.
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이 말은 예수님이 따라서 ‘파라볼레’가 아니라 ‘파로이미아’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상징’(symbol)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제 구약의 민수기 사건을 가져온다.
민수기21:6 불뱀을 보내어 물리는 자마다 죽게 된 사건
- 불뱀에 물렸으니 해독제는 무엇이 있겠는가?
그 당시로는 없었다. 어떤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답을, 문제 해결의 길을 알고, 가지고 계셨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매달아 놓는 것 - 놋뱀이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방법이 있으시구나. 그들이 불순종 때문에 불뱀을 보내어 죽게 되었는데, 살게 되는 방법은 순종이다.
우리가 쳐다보는 것, "쳐다본즉 살더라 = 순종하니 살더라"와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표적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사람들의 눈에는 이적, 기적이다.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영역이다.
이 얼마나 신비한가?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은 신비하다.
원래「표적」이란 히브리어로「오트」, 헬라어로는「세메이온 σημεῖον 」이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수 십 번 나타나고 있으나, 신약에서는「세메이온」이「이적」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며
「기사」라고 번역되기도 했는데 「테라스(teras)」라는 말과 함께 사용되기도 하였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σημεῖον) >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가시다 (마 16:1 - 4)
표적은 초자연적 능력을 통해 바깥으로 나타난 현상을 말한다.
예수님은 여기서 요나라고 말씀하신다.
요나가 보여주는 상징(모형)은 무엇인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물고기 배 속에 들어갔다가 사흘만에 살아난 것을 말한다.
예수님 자신의 죽으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요나의 기적(표적)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죽은 사람, 곧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처형되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면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도무지 살아날 수 없다. 불가능, 그것은 신의 영역이다.
제단에 바쳐진 이삭은 비유이다. 죽은 것이다. 도로 받은 것이다. 즉 부활을 상징한다.
이처럼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택한 사람만 그리스도께로 오게 하여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장치이다.
‘은유’(metaphor) 혹은 ‘풍유’(알레고리, allegory)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상징, 모형’도 넓은 의미에서는 ‘비유’(比喩)에 속한다.
비유(파라볼레)와 상징(파로이미아)의 차이
‘비유’는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제시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실제 삶에 대한 묘사나 이야기이다.
비유는 하나의 이야기(story) 형태로 말해진다.
즉, “미련한 자는 공이로 찧어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잠언 27장 22절)
- 미련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미련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르는 말
아주 실감나는 실생활에서 알 수 있는 소재를 가져와 이야기로 설명한다.
이야기를 들으면 청중은 스스로 판단하고 교훈을 끌어내도록 유도한다.
그 교훈은 대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 둘 셋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 핵심 되는 중심 교훈은 역시 한개 뿐이다.
비유는 객관적인 진리를 곧바로 이야기 하기 보다 어떤 사물에 빗대어(은유적으로) 설명하므로 쉽게 이해 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따라서 ‘상징’에는 비유에서와 같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가 필요치 않으며
한 단어, 한 단어가 바로 그에 대응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잃어버린 양’ 비유(눅 15:4-7; cf. 마 18:12-14)와 ‘선한 목자’ 상징(요 10:1-18)을 들어 생각해 보자.
‘잃어버린 양’ 비유가 보여주려는 주네는 무엇인가?
일백 마리의 양들 중에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묘사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다소 다르게 묘사하고 있지만, 이런 조그만 차이는 중요치 않다.
이 비유는 주제는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 대한 목자의 가슴저미는 관심과 뜨거운 사랑을 말하려고 한다.
결국 청중(독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향한 주님의 마음, 곧 찾으시고야 마는 열정과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고 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을 보자.
이 이야기는 어떤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따로 없다.
생활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것이다.
1, 2절에서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고 직접적으로 진리를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들은 ‘양과 선한 목자’이야기를 통해 양은 우리들이고, 목자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어서 3절,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란 말씀에서
'목자와 양', 곧 '예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가 설명한다.
선한 목자 = 예수, 양 = 믿는 자들,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림 = 희생, 대신하여 죽음(사랑, 자비, 은혜)
그래서 10절의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에서는
예수님께서 양들 곧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목자가 양을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처럼 상징에서는 '한 단어, 한 단어 그리고 한 문장, 한 문장'이 각각 독립적인 의미를 가진다.
비유보다 더 직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상징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청자가 해석하고 이해할 몫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전체 문장의 의미는 청자에게는 모호한 채로 남게 된다.
전체적으로 선한 목자에 대해 말하고 있는 문맥(1-18절)에서
예수님은 갑자기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다(7-9절).
이처럼 상징의 성격이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는 각각의 독립된 단어와 문장으로서 별개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다른 상징어들>을 사용하여 표현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처럼 상징어를 통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그 상징어가 무엇(또는 누구)을 가리키며,
그 문장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다.
예를들어 포도나무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농부, 예수님 자신은 참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이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방법은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이다.
자 오늘 말씀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다 라고 말씀한다.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세상의 생명을 주기 위한 내 살이다.
이 말씀을 육의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불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것은 영적인 것이다.
그의 말씀은 생명이다.
육신의 떡 vs 썩을 양식 = 떡(오병이어) vs 예수는 생명의 떡 =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가 일러준 말씀은 생명이다.
"육은 무익하다. 그러나 영은 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