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com/shorts/dAt0GO4ItoI?si=qB-Ba4z2LX01MMWQ
신약성경 첫머리에 예수님의 공(적)생애를 기록한 네 개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세 권은 공관(인성에서 신성에로의 상승기독론/ 인간 예수에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같음)복음서라고 부르는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신성에서 인성으로의 하강 기독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육신 곧 인성을 입으시고 인자가 되심)은 공관복음서가 기록하지 않았거나 설명하지 못한 부분들을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출생, 세례받으심, 시험받으심, 최후의 만찬-성찬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승천 등>의 상당히 많은 중요한 사건들 조차도 다루지 않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비유>에 관한 말씀들도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또 공관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내용들이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2장), 관원이던 니고데모가 예수를 찾아온 사건(3장), 유대인들이 상종도 안하던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에서 만난 사건(4장),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부활 사건(11장), 유월절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13장), 진리의 영이신 또 다른 보혜사 곧 성령에 관한 다락방에서의 긴 강화와 중보기도하심(14장-17장) 등이 있습니다.
예수의 사역에서도 활동하신 주 무대로서 장소와 차이가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북부 갈릴리(가나, 나사렛, 가버나움, 벳새다, 각1회씩 - 가이사랴 빌립보, 시돈, 거라사)가 사역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주된 사역의 중심이었고, 유대인의 3대 명절과 유월절이 언급되고 수전절이 나온다. 또한 다른 명절(5장)과 수전절(10장), 초막절(7장)에도 예루살렘에 머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들을 기록하면서 공관복음서들과는 <초점>을 다르게 맞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더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마태는 혈통적이고, 믿음의 후손적 관점(하강)에서 족보를 가지고 기록하였고,
누가 예수로부터 하나님까지의 역으로 상승적인 관점에서 족보를 기록합니다.
마가는 족보를 생략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막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을 설명합니다.
서론
신약성경은 첫번째 네 권의 책은 에수님의 공생애를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35가지를 기록하고 있는데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먼저는 "이적(異跡/異蹟 :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고, 또 하나는 기적 (奇蹟 : 불가능했다고 여겨진 기이한 일)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표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오늘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의 행하신 많은 기적들 가운데, 사도요한이 7가지 사건만을 골라서 <표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그려면 왜 요한은 많은 표적들도 있었는데 7가지만을 기록했을까요?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표적 사건이라고 말하면서 '표적'(表蹟, sign)은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외부로 나타난 현상으로 표적은 헬라어 ‘세메이온’(Semeion)을 우리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싸인’(Sign)입니다.
‘세메이온’(Semeion)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며 비상한 사건(일)을 의미합니다. 즉, 그 표적은 설명이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설명이 없으면 우리는 이적, 기적으로 취급하지만, 그 사건이 가르키는 내용 곧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요즈음은 도장으로 날인하던 것에 사인을 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인은 다른 사람이 처음 볼 때에는 그냥 무언가를 표시하는 모양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의미 곧 사인을 한 그 사람을 유일하게 설명해 주는 <표시>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행하신 사건들은 의미를 담고 있는 <신적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표적은 그 사건에는 단순히 기이한 일이나 독특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질(性質 : 그 존재가 본래 갖추고 있는 본성, 本性)을 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오병이어와 바다위를 걸어 오심>의 사건은 하루 동안에 연속해서 보여주신 사건으로 하나는 <낮시간>, 하나는 <밤시간>에 보여주셨습니다.
오병이어는 4개 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바다위를 걸어오신 사건은 신약성경의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22~36, 막6:45~56, 요한복음6:16-21)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 사건은 총 7가지 사건 중 4번째로 앞에 3가지, 뒤의 3가지가 있고, 그 중심에 있고 분수령입니다.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 오경가운데 그 중심에 레위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성경 5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심에 있는 레위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오경의 각권마다 담긴 내용들은 각각의 주제가 있습니다.
무에서 유에로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창세기),
노예에서 구속하시는 하나님(출애굽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레위기)
광야의 길을 인도하시는 주(민수기),
우리가 지켜야할 말씀을 주시는 주(신명기)입니다.
이 모든 것을 주신 목적을 레위기에 담고 있습니다.
레위기에 우리가 어떻게 그 하나님을 예배하며 교제하고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레위기는 이 모두 네 가지가 가리키는 봉우리입니다.
즉,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시며, 인도하시는 주이시며, 말씀하시는 주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입니다. 요한복음은 이와같은 구약적 의미들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7대 표적 사건'
1. 가나 혼인 잔치의 물로 포도주로 변화 (2:1~11) : 창조적 사건 - 말씀으로
2. 신하의 아들 병을 말씀으로 고치심(4:46~54) : 질병에서 해방, 고치심, 살리심/새생명
3. 38년 된 병자 고치심- 안식을 주심(5:1~18) : 질병에서 해방, 참된 안식을 주심
4. 오병이어 기적(6:1~15) / 먹이시고 책임지시는 분
5. 물 위로 걸으심(6:16~21) / - 자연을 지배하시고 험한 세상을 인도하심
6. 소경의 눈을 고치심(9:1~41)/ - 새사람으로 만드심
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11:1~57) -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부활/생명을 주심
오늘 말씀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당일에 하루 <두번>의 표적을 보여주신 사건이 연달아 기록되어 있습니다.
앞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표적 사건>은 낮 시간 오후에 보여주신 사건이라면,
이어서 보여주신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표적 사건은 가장 깊은 밤(3~6시경)에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먹여 주신 사건》과 비교되는 기적이라면,
그 날 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걸어오신 사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제자들이 애쓰며 노를 저어 보았지만, 십여리 밖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걸어 오신 사건은 무엇을 알려 주시기 위한 것일 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로 알기를 원하셨을까요?
단번에 알려주기 보다 서서히 단계별로 제자들의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7대 표적 중 네번 표적은 제자들에게 《신앙의 분수령》이 된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누구로 알아야 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 이후에 오병이어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이해할 수 없다며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떠나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베드로의 대답 속에 예수님이 밤에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어 오신 이유를 담고 있습니다.
오병이어를 통해 한 차원 높은 표적 사건/ 모세와 비교되는 사건을 보여 주셨고,
바다위를 걸어오신 예수님을 눈으로 보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것을 보여 주시려고 물 위를 걷는 표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앞에서 오병이어 사건부터 드디어 차원 높은 수준의 <무엇>을 보여 주시기 위한《표적》이었습니다.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은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이 비로소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더 구체적으로 증거하신 중대한 사건(표적)입니다.
이후의 이적들은 모두 신성을 더 적극적으로 보여 주시는 사건들입니다.
본론
{상황}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은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전개되었습니다.
1. 오병이어 표적을 경험하고 기뻐했을 제자들, 무리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던 예수님, 그리고 12 제자들이 광주리에 가득 담긴 떡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홀로 산으로 가시자 그들은 결국 어둠 속으로 사라지듯 가버렸습니다. 그들은 한마디로 <영적 무지와 어두움, 눈멈>의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날이 저물어 어둠이 내리던 밤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먼저 보내셨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은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있기전 제자들의 믿음은 <현실이냐? 믿음이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치 <분명하게, 단단히 하기 위해 쐐기를 박듯>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 믿음에로 넘어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바다위를 걸어오신 사건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홀로 산으로 떠나가셨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께 실망함 뿔뿔이 흩어지듯 떠나갈 때 그들은 자기들의 소망이 무너지자
허탈함, 낙심, 원망, 불신.... 등이 섞이 어둠 속으로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의 입술에는 실망과 원망이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임금이 되어서 좋고, 자기들은 새로운 임금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좋고.....
그러나 그들에게 남아 있는 여운이 있었습니다. 머리로는 오병이어를 생각하면서...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아직 알 수 없는 알송달송하기만 했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떠난 시간은 도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다에 내려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고생하며 가버나움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7시간 이상을 노를 저어 가려고 했지만, 십여리(4km) 밖에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풍랑과 싸우며 전진하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어두운 밤에, 사경을 헤매듯 고생할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힘든가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을 우리를 찾아오시고 당신의 영광을 보이십니다.
우리의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2. 그들을 보고 계신 예수님
밤사경(3~6시 사이)에 홀로 산으로 가셨던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인가 하여 놀랐습니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을 통해 얻는 4가지 교훈
18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우리 인생을 살다보면 힘든 일들이 많다.
47절, 보면 제자들이 타고 출발한 것은 해가 저물 무렵이었다(늦어도 저녁 8시나 9시는 되었을 것)
그런데 밤 사경(밤을 네 등분해서 사경)은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였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노를 저으며 불안과 두려움, 공포로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성경은 48절,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이 괴로이 노를 저었다”고 말씀한다다.
제자들은 예수님 없는 (부재) 상황에 불안과 두려움, 공포와 낙심....
- 예수님이 먼저 가라고 했는데, 왜 제자들에게 고난이 닥쳐 오나?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 부재의 상황에 처할 때에 불안을 경험한다.
마14: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먼저 출발하라고 재촉하신 분은 예수님이다.
① 그 고난은 누구에게나 닥쳐온다
② 그 고난은 예기치 않은 어두운 밤에 닥쳐온다
③ 그 고난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 신자에게도 닥쳐온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님은 우리가 인생의 바다에서 고난당할 것도 아시고 또 지켜 보고 계신다.
1)예수님은 우리의 폭풍을 아신다
- 인생 항해에 닥쳐오는 풍랑 : 고난
이제는 제자들에게 바다에서의 시험에 예고되어 있듯 우리에게도 시험이 있다.
제자들이 오병이어 기적을 체험하였으므로, 이제는 《믿음으로 반응》하고 보여줄 때가 되었다.
마14:22~, 막6:45~에도 기록, 그 중에 마14:24을 보면 당시 상황을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그런데 에수님의 음성이 들려 옵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으로 제자들을 안돈시켰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들의 인생에 주님의 음성은 어떻게 듣습니까?
엘리야, 다니엘,....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님은 찾아오셨고, 여러가지 이상과 말씀으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는 음성은 모세를 부르셨을 때 하시던 음성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들리던 주님의 그 음성,
유령에 놀란 제자들처럼 모세도 당신은 누구입니까?
"나는 나이다(I am who I am)"
2)우리는 예수님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19절. “ ... 제자들이 ...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
예수님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 떨었다.
마14:26, 심지어 예수님을 가리켜 유령이라고 소동을 떤다. 이미 밤이었다. 달빛에 의지하여 노를 젖고 있었다. 아마도 구름이 가리웠다면 더 더욱 공포였을 것이다. 비록 어부출신으로 늘상 경험한 바다였어도.
오병이어 기적, 이전과 이후
바다 위를 걸어오던 시점 이전에는 제자들에 대해 예수님은 책망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사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언가를 깨닫도록 하신 교훈이 있었고, 그 사건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갖도록하는데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확증적이었다.
즉, 오병이어 기적은 모세와 출애굽 때 만나를 먹은 사건과 비교되는 사건이었다. 또 모세를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그 선지자(신18:16).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은 "심령이 둔해서" 아직도 온전한 신앙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 막6:52은 잘 지적하고 있다.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3)불신은 우리를 바다에 빠뜨릴 뿐이다.
- 풍랑보다 더 큰 문제 : 불신앙
베드로는 예수님께 ‘당신처럼 바다 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바리보며 바다 위를 걸었다.
4)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바다에서 항해를 마칠 때까지 함께 하신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현장에 함께 허신다.
20절. “내니 두려워 말라!”(It is I. Don t be afraid!) 예수님은 또한 제자들을 향하여 “내니(나다)”라고 말씀하셨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영어로 “I am”인데 이는 《신적 자기 언명》이라고 한다.
이는 출3:14 ‘여호와’라는 명칭도 “I am who I am”에서 유래했다. 예수님이 단순히 "나다"라고 밝힌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유령인가 하여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나야 나!”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무었 때문일까?
이것은 출3:14의 말씀과 같다. 모세가 하나님께 백성들에게 뭐라고 소개해야 되나 질문하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라고 말씀하셨다.
이제는 너희가 나를 인자 곧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이심을 알기 원한 것이다.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3.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탄 배를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시켰습니다.
요6: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나가시려고 하다가 배 안으로 영접한다.
우리가 인생의 풍랑을 이기는 길은 예수님을 찾는 것이다. 멀리 계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항상 곁에 계신다. 우리를 보고 계신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의지한다면 어둠 속에서도, 불안과 두려움, 염려 속에서도 위로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그 후에 어떻게 하십니까?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항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도와주십니다.
이 세상 살 동안, 그리고 그 후에 천국에 안착할 때까지 책임져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