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벤에셀 하나님(Yahweh of Ebenezer[אֶבֶן הָעָזֶר]
사무엘상 7:1-14
1.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4.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
5.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하여
8.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따라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13. 이에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14.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경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에벤에셀(Ebenezer, אֶבֶן הָעָזֶר)은 히브리어의 음역을 그대로 쓴 것입니다. 이 단어는 '돌(stone)'이라는 뜻의 '에벤 Eben(אֶבֶן)과 '도움(help)'이라는 뜻의 '에젤 Ezer(עָזֶר)'이 합쳐져서 '도움의 돌(the stone of help)'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원래 발음할 때에는 "에벤하에젤"이라고 발음합니다.
따라서 '에벤에셀 하나님'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또는 여기까지 우리를 도와주신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우리의 도움이 되셔서 인도하신 하나님"이 '에벤에셀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의 진실된 마음을 담아서, 정말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에벤에셀 하나님!"
우리 뉴욕퀸즈 리폼드 교회가 올 7월7일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세워져서 어느덧 6개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여러 사람이 이곳을 거쳐 갔고,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계신 분들이 이렇게 아직 저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의지로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기분같아서는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고, 거리상으로 보더라도 얼마든지 가까운 교회에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다리를 건너고 비싼 통행료를 내가면서 이 멀리까지 달려오십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여러분을 이끌어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인도하심은 여러분을 힘들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에벤에셀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도와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묵상해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죽으라고 듣지않는 강퍅한 이스라엘... 그리고 그 이스라엘의 제사장인 엘리.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이 세명의 제사장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악한 자들이었고,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엘리의 가문을 망하게 하실 계획을 세우셨고, 그 대신에 사무엘을 제사장과 선지자로 세울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블레셋(Philistines)이라는 이웃 나라를 일으키셔서 이스라엘과 싸우도록 하셨는데,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법궤(the Ark of the LORD)를 블레셋에 빼았겼고,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모두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자빠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법궤(the Ark)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자기들의 '다곤 신전'에 함께 갖다 놓았는데, 그 다음날 다곤신전에 가보니 그들의 우상인 다곤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엎드려 얼굴이 땅에 닿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곤신을 일으켜 다시 제자리에 세웠는데 그 다음날에 가보니 전날과 똑같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는데, 머리와 손목이 잘라졌고 몸둥이만 남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곳 아스돗 사람들에게 독종의 재앙을 내리셔서 많은 사람이 죽게되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Philistines)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새수레를 준비해서 여호와의 궤를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벧세메스에 있는 사람들이 궁금해서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보다가 70명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슬프게 통곡을 하면서 "과연 누가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을까?" "도대체 우리는 이 궤를 어디로 보내야 한단 말인가?"라며 고민을 하다가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사람을 보내서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우리에게 돌려 보내왔으니 이것을 가져가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기럇여아림에 사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산에 사는 '아비나답(Abinadab)'의 집에 옮겨다 놓고,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Eleazar)을 거룩히 구별하여서 여호와의 궤를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성막(Tebernacle)이 실로(Shiloh)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법궤를 실로로 가져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를 신학자들은 다음의 3가지로 생각합니다.
첫째로, 사무엘이 제사장이 되기 이전에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이 그곳에서 제사장직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가 빼앗겼던 것입니다. 즉 성소가 있는 실로라는 곳이 제사장들로 인해 더러워졌기 때문에 법궤를 빼앗겼다고 백성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럽혀진 그 장소에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궤를 가져가기를 꺼렸던 겁니다.
둘째로, 그 전쟁을 '아벡 전투'라고 부르는데(삼상 4:9-11), 아벡 전투시에 실로가 블레셋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셋째로, 법궤를 보다 안전한 곳에 두기 위하여 큰 도시보다는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두는 것이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은 기럇여아림의 교외부근 산지 즉 외딴 곳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은 모세의 형 아론의 아들인 '엘르아살'과 동명2인입니다. 즉 이름이 같은데, 다른 사람으로 표기하기 위하여 한국어 성경에는 '엘리아살'과 '엘르아살'로 다르게 썼지만, 본래는 같은 이름이며 영어로도 똑같은 단어(Eleazar)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호와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법궤를 지키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거룩히 구별하다(consecrated(sanctified) Eleazar)"라는 말은 제사장으로 임직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28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3절을 보면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consecrate him)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41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것들로 네 형 아론과 그와 함께한 그 아들들에게 입히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ordain (consecrate) them) 그들로 제사장 직분을 내게 행하게 할찌며".
"거룩히 구별하다"라는 히브리어 '카데쉬(קָדַשׁ)'라는 단어는 여러 의미로 쓰였는데(sanctify, consecrate, hallow, dedicate, holy, appointed), 본문에서는 '성직에 임명하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법궤를 가져왔다면 제사장이 필요하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아살이 제사장 가문은 아니었으나 레위지파이기 때문에 그를 제사장으로 세워서 법궤를 지키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된 엘리아살의 임무는 제사를 드리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를 잘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아벡 전투로 인해 실로가 파괴되면서 공식적인 제사는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의 목회자들은 예배도 중요하지만, 예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그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말고, 또는 좌우로 치우치지도 말고, 오직 그 말씀대로 지켜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들은 어떠합니까? 말씀연구보다는 어떻게 하면 교회를 부흥시킬까...를 연구하며, 사람들의 심리를 알아야 부흥이 되므로 심리학, 상담학 등을 공부하고 세미나에 참석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목회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를 포함한 모든 크리스천은 오직 말씀을 붙잡고 말씀대로 지켜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오신 뒤에 제사장직은 없어졌고, 크리스천 각 개인이 모두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각자 올 한해동안 얼마나 성경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썼는지 스스로 체크해보시기 바랍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땅에 들어왔지만, 2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있었고 그때까지도 불레셋(Philistines)의 영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모하다"라는 히브리어는 '나하(נָהָה)'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슬픔이나 고통, 절망으로 인해 통곡하고 부르짖다(wail, lament)'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과거의 잘못으로 인해 현재의 고통이나 환난을 통해 애통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행위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에스겔 32:18에서 "애곡하다"라고 쓰였고, 미가 4:2에서는 "애통하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자신들이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자기 멋대로 살다가 이런 재앙을 당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예배도 마음대로 드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자유롭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때를 그리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절대로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게 해서 그들의 자녀들도 태어날 때부터 허리를 굽히고 땅만 쳐다보며 어두운 땅 밑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나 목과 허리가 아프겠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요. 여러분이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어떠한 일로 인해 디스크가 생겨서 목과 허리와 어깨 등 많은 부분이 아프다고 하지만, 그들과 비교가 될까요? 그러나 현재 고통속에 계신 분들은 무척 힘이 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고통을 통해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건 겪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평생을 허리를 굽히고 스트레칭을 전혀 할 수도 없고, 하늘을 볼 수 없는 땅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런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겠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그 자유를 버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주일날 하루도 하나님께 바치지 못한다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환난 속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때를 그리워하며 애통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성도는 주안에서 말씀을 지키는 가운데 자유해야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생각하며 애통하며 하나님을 찾게 되자 사무엘은 3절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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