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에서는 즉각적인 깨달음,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던 성철스님은 1982년 4월 8일(석탄일) “극락에 가기 위해서 불교를 믿고 있다면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라고 설파했습니다.
목적과 목표는 다릅니다.
그런데 인간의 탐심은 이것을 뒤바뀌게 만듭니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있지요.
그러므로 목적을 바르게 설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수신제가치국편천하인데, 수신이 없이 평천하를 꿈꾸고 있지요.
우리의 과제는 매 순간, 나의 가는 길을 돌아보며 성찰하고 바르게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더 정진해야 합니다.
사실 높은 수행경지에 이른 그가 한 말을 여느 사람이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언어의 유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해석해 주지를 않습니다.
스스로가 깨우치도록 고민하고 생각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득도에 이르는데 거져 얻도록 해 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해석이 분분합니다.
글을 너무 쉽게 깨달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쌩 떽쥐베리의 ‘어린왕자’라는 책에 보면 여우가 왕자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나오는데 ‘올바른 것은 마음으로 봐야지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 줍니다.
명칭과 본질
"산은 산, 물은 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라는 이 법어는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청원 유신(靑原惟信) 선사의 법어이다.
이 말은 본래 '마음이 청정하면 세상도 청정해진다'는 말이다.
반대로 깨끗하지 못하다면 세상이 그에게 어찌 보이겠는가?
누구나 산을 볼 때 <산>이라고 말한다.
명칭으로서의 산과 실제로 산에 들어가 보는 산은 다릅니다. 내 눈에 들어 온 <산>이라 명칭하지만, 그 산은 산이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명칭으로는 산이라고 부릅니다.
눈에 들어 온 산은 평지로부터 불쑥 솟아 올라 능선과 골짜기와 나무와 바위, 흙과 풀과 짐승과 어우러지고 많은 요소들로 구성되어 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에는 하늘과 구름과 나무로 뒤덮인 산이 들어 올 뿐이다. 그래서 산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산의 요소들인 우거진 수풀 사이로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풀벌레 소리... 이름 모를 나무와 풀들과 버섯, 가랑잎, 돌, 짐승 등.... 수많은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와 그 외에 것들을 봅니다.
그러나 다시 그 산에서 나오면 그저 산으로 되돌아 갑니다.
우리가 ‘바다’라고 부르는 해(동해, 서해....)에는 온갖 것들이 그 곳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다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리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수평선과 배와 넘실대는 파도 뿐입니다. 바다는 그것들을 일컫는 명칭입니다. 비록 바다에 있는 수많은 생물들과 플라크톤과 소금물의 농도와 물고기들 ... 세세히는 모른다고 해도 실제는 "바다"로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만큼 명칭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순히 명칭에만 매여 있다면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명칭에 매여 있습니다.
우리가 딸이라고 할 때 출생부터 결혼해서 자식을 낳았어도 딸입니다. 아버자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딸이라는 명칭 속에는 딸의 인생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딸>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에만 갇혀 있다면 아버지와 딸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버지라 부르고, 딸이라고 해도 눈으로 아버지를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은 다르게 보입니다.
명칭이 갖는 한계
그러나 아버지를 부르려면아버지라는 명칭을 불러야 하지 않는가.
아버지를 어린 아이 눈에 들어 온 아버지가 전부가 아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가 딸에게는 여전히 아버지인 것이다.
가치전도(價値顚倒)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 가치전도가 일어납니다.
눈에 보거나 명칭으로만 이해할 때와 마음으로 보거나 본질을 깨달았을 때 일어납니다.
그러다가 다시 명칭으로 돌아와도 그는 그의 마음에 담긴 그 것, 곧 마음으로 본 것과 그 본질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있습니다.
성철(스님)이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일생 동안 미친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수미산을 덮은 죄업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져서 한이 만갈래나 된다/한송이 꽃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분명 고승의 말이 어렵습니다.
이는 자신의 지식의 천박함을 겸손하게 표현한 역설일지도 모릅니다.
고승이 깨달은 그 깨달음의 눈과 마음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이해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이 시의 주체는 누구인가?
또 맺힌 한은 누구의 것을 지칭하는가?
1)(나는?) 일평생을 미친 남녀 무리를 속인 것으로
2)(내가 그토록) 일평생을 미친 남녀 무리를 속인 것으로(깨우쳐 주려했던 것)
- 그 죄업이 수미산을 덮고 하늘에 차 올라
- 산채로 아비지옥에 떨어진 그 한은 만갈래되어
- 한 바퀴 붉음을 토해내어 푸른 산에 걸렸다.
또 그의 법어 가운데,
사탄이여 어서오십시오.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부처님입니다.
당신은 본래로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님임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과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 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다없어지고 이 세계는 본래로 가장 안락하고 행복한 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일체의 불행과 불안은 본래 없으니 오로지 우리의 생각에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나아갈 가장 근본적인 길은 거룩한 부처인 당신의 본 모습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에 온 세계는 본래 부처로 충만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러운 뻘밭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가득피어 있으니 참으로 장관입니다.
아! 이 얼마나 거룩한 진리입니까?
이 진리를 두고 어디에서 따로 진리를 구하겠습니까?
이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물 속에서 물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을 부처로 바로 볼 때 인생의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선과 악으로 모든 것을 상대할 때 거기에서 지옥이 불타게 됩니다.
선악의 대립이 사라지고 선악이 융화상통할 때에 시방세계에 가득히 피어있는 연꽃을 바라보게 됩니다. 연꽃 마다 부처요 극락 세계 아님이 없으니 이는 사탄의 거룩한 본 모습을 바라볼 때입니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동산에 앉아서 무엇을 그다지도 슬퍼하는가?
벌나비 춤추니 함께 같이 노래하며 춤을 추세.
[1987년 부처님 오신날 법어에서.
1987년 4월23일 조선일보 7면,경향신문 9면
조계종 종정사서실(큰빛총서 1- 서울사시연 1994년 p.56~59)]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희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희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무리 고승이 터득한 진리라 해도 그가 한 말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의미가 없는 소리에 불과하지 않는가.
일평생 도를 닦고 수행하고 진리를 탐구해도 다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태산 아래서 호미를 가지고 태산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은 것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일이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라도 해서 아는 것만큼 아는 것이 그의 삶을 더 풍요하고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이지요.
깨닫고,
이해하고,
더 생각하게 되고,
또 알아 가고,
그리고 그것을 나에게 적용하고,
그래서 깨달은 진리에 부합하게 살 때 행복이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는 진리는 먹어야 합니다.
진리를 소화해서 나의 몸과 하나되게 해야 합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그 진리는 무엇인가?
서양에서 철학 곧 필로소피아는 필로스(사랑함)와 소피아(지혜)라는 두 말의 합성어로 애지(愛知)”이다.
안다는 것은 힘이다.
참[진리]을 안다는 것은 무지와 거짓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래서 진리를 알아야 한다.
하늘의 진리를 절대 진리라 하며
땅의 진리를 보편 진리라 한다.
보편 진리는 시대마다 변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늘의 진리 곧 절대 진리를 알 때 거짓과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의 진리는 무엇일까.
하늘에 속한 진리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