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는 생명의 근원과 원천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담에게 알려 주는 나무이다.
선악과(선악을 알게하는 지식의 나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반대편을 의미한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내가 보니 참 좋구나"고 하셨다.
그런데, 이것을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것은 악이다. 악은 파괴이며, 죽음, 사망이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
하나님께서 이것을 무엇으로 알게 하셨을까?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의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는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나무였다.
실낙원 이후에 아담은 에덴에서의 생명나무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다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부분적으로 열어 놓으셨다.
바로 예배이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다시 생명으로 나아오도록 부르시는 만남의 장소이다.
아벨은 그 길을 아담에게서 배웠다.
고대 근동의 신화, 서사시 또는 각종 도상학(圖像學)
아담 이후로 에덴동산과 생명나무이야기는 모세까지 구전으로 내려온다.
노아 홍수와 바벨탑 이후 흩어진 무리들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로 전해졌을 것이다.
성경과 전혀 상관된 것을 찾을 수는 없지만, 인간이 얼마나 영생을 갈망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고고 근동사회에서 생명 혹은 영생 추구에 대한 내용이나 이미지들이 소개된다.
메소포타미아 아카드 문헌에 등장하는 한 남자 아다파(Adapa)가 무언가를 먹고 영생을 얻을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 영생의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에서는
길가메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늙어도 젊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된다는 식물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다.
수메르 신화의 키스카나 나무(The Kiskana Tree)는 생명수로부터 물을 공급받아 풍성하게 자라고,
치료의 힘을 가져 생명을 새롭게 하는 나무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이 고대 근동인들은 생명을 열망했고, 생명을 주는 신성한 나무는 그들에게 익숙한 주제였다.
생명나무(עץ החיים), "그 생명을 주는 나무" "그 생명을알려주는 나무"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נִשְׁמַת חַיִּים 니쉬마트 하임]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
사람이 ‘생령’[נֶפֶשׁ חַיָּה 네페쉬 하야]이 되니라. [개역개정]
생명나무는 이와같이 하나님이 생명을 주심을 알리는 장치이다.
“생명나무”는 “에츠 하하임(생명들)”으로서 복수이다.
“생명나무”는 실체는 무엇인가?
그 생명 =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현존이며, 상징이다.
문법적으로는 ‘그 생명의 나무’ (에츠 하하임),
‘그 생명을 주는 나무’ ‘생명을 주는 열매를 맺는 나무’(a tree that produces life-giving fruit)이다.
아담은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는 의무가 주어졌다.
아직 하와도 없었다.
아담은 홀로 있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의 생명에 관하여 알게 하신다.
직역하면 ‘그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이다.
“생명”은 히브리어로 ‘하임’이다.
생명나무 이름에 사용된 ‘하임’은 창세기 2장 7절에서 하나님의 “생기”(니쉬마트 하임)에도 쓰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우리말로 “생기”는 히브리어 “נִשְׁמַת חַיִּים”(니쉬마트 하임)이다.
“숨, 호흡, 기운, 영혼” 등의 의미를 가진 “נְשָׁמָה”(네솨마)의 연계형 “נִשְׁמַת”(니쉬마트)와
“생명”의 의미를 가진 “חַי”(하이)의 복수형 “חַיִּים”(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여기서 복수형 “חַיִּים”(하임)은 풍성한 생명력, 즉 영원한 생명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נִשְׁמַת חַיִּים”(니쉬마트 하임)은 “영원하고 풍성한 생명력의 호흡”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 명사와 형용사 형태의 기본형은 חָיָה (하야)란 동사인데 ‘살아있다/살아가다’란 뜻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람(아담)에게 불어넣으신 “생기”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 “생기”임에 틀림없다.
70인역(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에는
“αὐτοῦ πνοὴν”(아우투 프노엔)인데, 번역하면 “그 자신의 생기를”(Breath Himself)이 될 것이다.
아담이 생령되게 했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기”는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생기”임이 더욱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생기”를 받은 아담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영생)을 소유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생령”(네페쉬 하야)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아담이 “생령”(살아 있는 생명체)이 되었다.
성경저자는 “생명”(하임)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아담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생명의 조성자이심을 알리며 이를 생명나무와 연결시켰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께 생명의 근원이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이며 기념적인 나무이다.”
“아담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면서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라고 말한다.
생명은 인간 자체 안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주이시며 공급자이심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그를 섬기는 삶이 생명나무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셨는가?
그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생활의 중심에 두기 위함이다.
그들은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분을 섬김이 자신의 본분임을 기억해야 했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에서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통과하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질 것이라는 언약을 의미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가 아닌 생명나무를 선택하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며
종국에는 생명나무가 주는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된다.
생명나무의 비밀
만일 우리가 창세기 2장만을 읽는다면 생명나무가 의미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1장은 생명나무가 의미하는 생명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요한복음 1장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한다.
창세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곧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부와 함께 창조의 중보자로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사역을 하셨다.
창세기 2장의 <생명나무>는 아담의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만일 이러한 창조의 비밀을 알려주시지 않았다면 아담은 자신의 출생비밀을 알 수 없었다. 아담이 저절로, 우연히, 진화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담의 정체성 곧 존재와 그 의미를 모를 수밖에 없다.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신 하나님이 계셨기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신 것이다.
생명나무를 통해 아담의 생명의 근원, 출처를 알게 한다.
생명나무의 반대는 사망나무(?)
'선악과(善惡果)'란 용어는 성경에 없다.
창세기 2장 17절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장황하게 표현하는데
히브리어로 <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메에츠 하다아트 토브 와라아>이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얻게하는 나무이다.
하나님은 선이시고 생명이시다.
그러나 반대로 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말한다.
악은 죽음을 가져다 준다.
선도 악도 하나님이 기준이시다. 율법을 주심도 바로 이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망나무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하셨을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함께 있던 나무를 사망나무라고 명명하지 않으셨다.
그 나무를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라 하셨다.
생명나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뜻하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을 말한다.
즉, 사망의 근원인 육신의 생각을 의미한다.
물론 사탄과 사주하던 뱀이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만든 주범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선택과 결정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약속)보다 자유의지를 육신이 원하는 바를 따랐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하나님을 따라는 신본주의가 아니라
이성으로 판단하고 경정하는 이성주의를 따르게 된 것이다.
인간의 자신의 이성을 최고로 안다. 착각이다.
그런 줄 알고 살아사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결국 자기들이 행복하고 좋은 것을 선택한다.
잠언 16:25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르지만 사실은 사망의 길입니다(12)."
여기에 언급된 "사람의 보기에"라는 말은 세상적인 기준이나, 인간의 눈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롬 1:28; 딤전 4:2).
선악과, 인간의 이성은 만물의 척도인가?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신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심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이므로
아담은 영생을 소유한 존재였기 때문에 가능한 경고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언하신 죽음은 단순히 육신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죽음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
웨스트민스터 신조 7조 2항의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그 안에서 그의 후손들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인간에게 네가 선악의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인간은 스스로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척도)으로 삼는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사람을 죽이고 빼앗고, 악행을 하고도 자기가 한 일이 옳다고 변명한다.”
모든 자기가 선과 악을 결정한다면 세상은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다.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다.
칸트는 “인간 안에 내적 재판정의 의식이 양심이다”라고 했다.
인간의 만든 법은 사회가 유지되는 안전장치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자신의 탐욕(선악과)을 추구한다.
그러나 양심이 이를 제어한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선악과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 사망이듯,
인간의 생각을 따라 행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하게 행한 일조차도
하나님은 아시고 심판하신다.
시편 90편,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속에도 이러한 사상이 나타난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