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의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이렇게 제안한다.
이 질문은 신자들이 스스로가 자신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참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구원의 확신을 갖을 수 있는가?
로마카톨릭은 "일반신도는 구원의 확신을 갖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권한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면, 신앙에 방종(구원파의 주장)이 온다고 보았다.
구원파의 구원 교리가 잘못된 점은 구원파에 빠졌다가 회심한 정동섭 교수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깨달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가르침을 주장하는 점이다.
* 구원파의 질문 : 당신은 언제 구원받았습니까?
신자를 사제가 통제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는 성경이 증언하고 확증한 것이기 이를 근거로 한 것이다.
싱클레어 퍼거슨의 <온전한 그리스도> 제 11장
그리스도인이 갖는 구원의 확신은 <자기 확신과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확신,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양자의 영이요 은혜의 인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유산인 성령 안에서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이제 구원받았으니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어!라는 식으로)은 우리를 방종으로 이끌거나,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율법폐기주의자로 몰고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이며 건강한 경험이다.
구원이 주는 즐거움과 기쁨은 더 더욱 그리스도의 은혜에 매이게 한다.
그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더욱 경배하고 경외하게 한다.
율법은 죄를 이기게하는 능력이나 도움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회개하여 더욱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확신이 현저히 부족한 것은 대체로 병적인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런 병적인 상태의 여러 가지 요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기초와 수단을 혼돈함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의 근거와 기초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
대부분 자신 안에서 감정이나 무슨 증거를 찾고자 하는데서 기인한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가장 미묘한 장애물이다. 뿐만 아니라 가장 흔한 장애물이기도 하다.
구원의 확신을 얻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과 구원의 기초를 혼동하곤 한다.
자신의 섬김을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삼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오직 <확신의 기초>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잠시 버려두고 일단 어떻게 확신을 얻을지 생각해 보자”라는 식의 말은 전혀 옳지 않다.
기초는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증언들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출발점이요, 첫단추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우리의 성화만 살펴서 진정한 확신을 얻을 수는 없다.
내 안에서 무슨 변화가 있었는가 부터 찾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섬기는 삶으로 구원의 확신을 확인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
구원의 확신의 기초는 그리스도께 있다.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신앙의 핵심에 기반하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을 신뢰하고 확신해야 한다.
참 신자라면 구원의 확신과 함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삼위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누리고 있는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히브리서가 제시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바라보자”는 말의 헬라어는 “아포론테스”인데 막연히 그냥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과 생각, 전인격이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주목한다”(looking to), “집중한다”(concentrate 또는 attention) “시선을 고정시킨다”는 의미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The LORD said to Moses, "Make a snake and put it up on a pole; anyone who is bitten can look at it and live."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7-9) 에서 쳐다본다는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 '나바트'는 놋뱀의 의미를 지혜를 가지고 골똘히 바라본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세가 광야 안에서 뱀을 높인 것같이 이같이 인자를 높이게 됨이 마땅하다(요 3:14)."
<뱀>, 히브리어 <나하쉬-שחנ>, "장대"는 '네스 (נֵס) '는 '빛나다', '눈에 띄다'란 뜻,
성경에서 뱀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4개(헬라어 2개)를 합하여 모두 6개의 단어가 있다.
① 히브리어 <나하쉬>는 제일 일반적이며 모든 뱀을 통칭하는 말이다.
② <사랖>은 '강렬한'의 뜻을 가진 것으로 사나운 뱀 즉 독사를 말하는 것 같다.
③ <탄닌>은 용으로서 출7:9이하에서 아론의 지팡이가 뱀으로 변한 사건에서 나온다.
④ 또 하나의 히브리어 단어는 <자할리>인데 기는 것이라는 뜻으로 뱀 뿐만이 아니라 벌레를 포함한다(신32:24).
⑤ 헬라어는 <오피스>로 일반적으로 '뱀'을 말하고, ⑥ <엘페톤>은 기는 것을 뜻하는 단어로 파충류와 양서류 동물들이 포함될 수 있다. 신구약성경에 약 70번의 '뱀'이 나오지만 이중에 3분의 2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놋 뱀이란 뜻은 히브리어로 '네하쉬(뱀) 네호세트(놋) : 예지력 있는 점쟁이'
뱀의 비유는 마귀, 사단, 독이 있는 것, 간교함으로 사용된다. 뱀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을 꾀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창3:1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뱀이 하와에게 말하고 있다. 이 문제는 동물학적인 문제로 풀려는 시도는 무리가 따른다. 신학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사나운 뱀으로 언급된 것(민21장)과 광야의 뱀이(요3:14) 동일한 것인지는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무서운 독사를 지칭한다고 볼 수는 있다. 적에 대해서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신32:33)고 했다. 시58:4에서는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같으니라고 했다. 제일 사나운 것은 융단 또는 톱니 비늘의 독사로 알려졌다.
사나운 뱀의 특징은 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독액이 피에 들어가 모세혈관을 파괴하고 혈구를 파혈시켜 목숨을 빼앗아 간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어 죽게했다(민21:6).
그리고 물리기는 했지만 죽지않고 있던 자들도 있었다.
민21:8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 사건은 구세주에 대한 묘사 중의 하나로 받아들여 진다.
예수님이 직접 이 때의 일을 상기시키며 요3:14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시편91:13에서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로 승리의 표현으로 사용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직접 '뱀'을 말씀하신 것은 대적자들을 향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23:33)라고 하셨다.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7:10, 눅11:11)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말씀하신 뱀같이 지혜롭고(마10:16),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막16:18)라고 하셨다. 그리고 승리의 표현으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눅10:19)라고 하셨다. 언제나 뱀은 간사하고 독한 것으로 나타나며 때로는 하나님에 의해서 징벌에 표현되기도 한다. 결국은 뱀을 이길 것을 표현하시는 것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출처: 뉴스앤조이] 장대 위의 놋 뱀과 십자가 예수님의 관계성
스펄전(C. H. Spurgeon) 목사의 간증
1850년 1월 6일 세찬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주일, 청소년이던 스펄전은 예배에 참석하고자 나섰다.
하지만, 거친 눈보라로 마차를 움직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근처 교회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회에 도착하여 머리와 옷에 묻은 눈을 털고 들어갔다.
교인이 1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예배당,
담임목사가 눈보라로 오지 못하자 집사 한 사람이 강단 위로 올라갔다.
초라한 옷차림에 얼굴은 창백해 보이던 그는 예배를 시작하였고,
그는 이사야서 45장 22절을 읽었다.
"땅 끝들에 있는 모든 자들아, 나를 쳐다보고 구원을 받으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이어 발음이 분명치 않는 단순한 말들로 열심히 외쳤다.
"여러분, 간단한 말씀입니다. 주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바라보는 데 무슨 힘이 듭니까? 손발을 움직이지 않아도 됩니다.
바라보는데 지식을 가져야 합니까? 무식한 자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라보는데 기간이 필요합니까? 나이가 많아야 바라 볼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린아이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단순하였지만 설교는 호소력이 있었다.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여러분은 자신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바라보라. 내가 피를 흘리노라.
나를 보라.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노라.
나를 보라. 내가 무덤에 묻혔느니라.
나를 보라. 내가 부활하였노라.
나를 보라. 하늘로 올라가노라.
나를 보라.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있노라.
죄인들아!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고 구원을 받으라!"
30여분 동안 그가 외치는 말씀들은 마치 스펄젼 자신을 향하는 것 같았다.
그는 스펄젼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청년이여! 힘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스펄젼은 그 순간 마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죄인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비로소 스펄젼은 예수께서 모든 죄악을 담당하셨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스펄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 구원의 확신은 오직 우리 안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오직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