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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는 자세

톺아보기(샅샅이 훓어 가며 살피다.)

토라(율법.법)의 말씀을 뒤집는 것이 독신(瀆神)이 아닐까?

히브리어 토라( תּוֹרָה 토랗, Torah) 은 '가르침'을 뜻한다.

그래서  모세오경(모세五經, תּוֹרַת־מֹשֶׁה)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라고도 한다.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단어/문구>가 갖는 전달의 한계성(번역할 단어가 없음)과

상황(그때 : 성경의 배경)에 따라 독자가 가진 언어적 이해의 깊이에 따라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시를 잘 이해하는 사람에게 시편을 읽을 때의 맛은 다르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읽는다면 전도서와 아가서는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누가 번역했느냐에 따라 맛이 다를 수 있다.

초벌번역가인가, 전문번역가인가, 특화된 번역가인가에 따라 그 맛이 다르다. 

춘향가나 흥부가 등 우리의 아리랑 같은 정서를 전달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언어는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고해서 다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요한복음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말씀/헬라어로 로고스이고, 히브리어의 다바르이다.

그런데, 말씀이 "계셨다(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었다)" 의인화되어 있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는가?

왜 사도 요한은 천상의 존재 곧 지상에 오시기전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헬라인들은 이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해하려고 하면 끊임없이 의문만 더 생긴다. 

저 유명한 괴테가 쓴 그의 <파우스트>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파우스트 박사는 세상의 온갖 지식을 섭렵하였으나 마음의 공허를 메울 길 없어 방황한다.

그러던 그는 하늘의 계시라도 받아보겠다는 요량으로 성스러운 성경의 원문(요한복음)을 펼친다.

그리고는 그의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하려고 한다.

그런데 첫 구절부터 꽉 막힌 듯, 멈추게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Im Anfang war das Wort, und das Wort war bei Gott, und Gott war das Wort

(우리말 번역) 처음에는 단어(낱말, 말, 어구)였고, 그 단어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신은 그 단어였습니다.

여기서 '말씀'을 그는 고민 고민하면서 

'말씀'을 => '뜻'으로도 바꾸어 보고

또 말씀 => '힘'으로로 바꾸어보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마침내 고심하던 끝에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로 옮겨놓고는 이에 만족해한다.

어찌보면 그나마 가장 가깝게 번역한 것이 아니었을까!

즉, 등가번역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언어가 없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단어를 찾아 뉘앙스까지 넣어 번역을 해야 화자의 내용이 전달된다.

요한이 로고스를 쓰기로 생각했던 것은 이 단어가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헬라어 '로고스" 계산, 가치, 비율적 또는 연관성, 

클래식 헬라어의 의미를 찾아보면  '로고스'(λόγος)라는 단어는 '말씀, 연설, 설명(account), 이성(reason)'  어원 상 '말'을 뜻하며 곧 말해질 수 있는 것, 이성의 원리. 즉 진리를 의미한다. 

그러면 헬라인들은 이것을 이해했을까?

 

여러분이라면 어떤 단어로 번역하겠는가?

우리말 말씀 조차도 충분하질 않다.

태초에 "도"가 계시니라

태초에 " ~  "가 있었다. 

그러고보면 괴테가 얼마나 대단한 정말 지성인 중의 지성인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태초에 ~이 있었다'.

각 나라마다 언어로 번역될 때 얼마나 다양하겠는가?

영어도 한계가 있다.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경험에 따라 로고스에 적합한 단어를 찾으려 애쓴다. 

 

그러면 성경 본문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먼저 시작하는 단어가 "태초에"이다.

이는 피조의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을 의미하고, 또 창세기 1:1보다 앞선 태초이다.

왜 요한은 하필이면 우리 말로 '말씀'이라는 단어인 헬라어 로고스를 선택했을까?

이 단어가 천상에 계셨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가장 적합한 단어인가?

차라리 "그"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예수는 누구인가?

'말씀'이라고 번역을 하면 '그 말씀을 하는 자'를 포함한다. 

성경 창세기 1장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다.

그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세상을 "~이 있으라"라는 선언의 말씀으로

그가 바라던 존재가 <무에서 유에로> 비로서 탄생하게 하셨다.

말에는 권위, 권세, 힘이 있다.

"똑같은 말이 한 순간엔 큰 희망을 방출하다가도,

다른 순간에는 살인 광선을 내뿜기도 한다.

똑같은 말이 한 순간엔 참이었다가 다음 번엔 거짓으로,

그리고 사태를 명확하게 조명해주다가도

또 다른 순간엔 기만적으로 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찬란한 지평을 열어주다가,

다음 번엔 수용소 군도에 이르는 통로를 세우기도 한다.

같은 말이 한 시점에서는 평화의 주춧돌이었다가,

다음 순간엔 그 음절 하나하나마다 기관총 소리가 울려 퍼질 수도 있다."

 - 바츨라프 하벨(1989년 10월 서독 평화상을 수상) 연설에서 -

말 곧 언어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고 이어주는 다리이다.

때로는 그 말의 내용에 따라 사랑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돌아서기도 한다.

성경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말씀' 곧 가장 위대한 권위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고 그 약속을 전달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인 동시에 이 세상 사람 모두의 성경이다.

예수 시대의 회당에서는 늘 말씀이 낭독되었다.

그 당시 회당장은 두 사람으로 하나는 전문적으로 말씀을 관리하는 사람, 또 하나는 행정을 담당한 회당장이 있었다.

회당장이 당일 문서고에서 가져온 두루마리를 낭독하면 이에 대해 누구나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었다.

랍비(성경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들)나 제사장들(전통을 더 중시하기에 어려서부터 몸에 배인 것대로 행함)이 그 말씀을 독점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한 해석권은 늘 그들에게 귀속되고 독점되었다.

그들의 해석이 옳았을까?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을 선배 랍비들에게 의존하였다.

그들이 경험하고 체험한 말씀이 아니라 자칫 "~라 카더라" 방송이 되고 말았다.

이는 성경해석에 대한 권한을 랍비들이 독점하고 제한시켰다.

이에 예수님은 옛 사람(모세와 선지자와 랍비)은 너희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예수님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선언하신다.

이는 당시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예수는 자신을 모세보다 더 위에 놓으셨다.

그리고 잘대적인 성경 해석의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자신으로 드러내셨다. 

예수는 가르침에서 우리는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당시 랍비들은 "율법의 자구(글자와 문구)"에 집착했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는 그 계명이 전달하고자 하는 그 속에 담긴 속뜻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명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5:17)

그리고는 율법에 집착하던 그들에게 충격적인 선언을 하신다(산상수훈 마태복음5~7장).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모세의 권위를 넘어 율법을 재해석하는가?

물리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죄가 없다고 할 수 없다는 선언이다.

즉, 그 이웃 곧 형제나 자매에게 성 내거나, 그들을 모욕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살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화해하기를 바라신다.

실제적으로 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면,

다시 말해 (그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했다면) 이미 간음을 한 것이다.

이혼 증서를 써주었다고 해서 부부 관계가 청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상대의 삶을 방치하여 죄를 짓게 하였다면 그것도 또 다른 간음이다.

비록 거짓 맹세를 하지 않았다 해도 '예' 할 때 '예'라 하고,  '아니오' 해야할 때 '아니오' 라고까지만 말하라. 

어떤 다른 어떤 말(조건)을 덧붙인다면 그것도 알고보면 결국 악한 일이다.

누군가 나에게 해를 입혔을 때 상대방에게 지나칠 정도의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를 미워하지 않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한다(마5:21-48절).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우리가 아는 것, 즉 고정관념이 생겨 그것으로 남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던가!

안식일을 나는 잘 지키고 있는가?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드린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안식일 법이 사람을 옥죄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막2:27)

이제 당신의 생각도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그저 전달하는 문자에 집착하거나 매이면, 정작 그 문장 전체가 전달하고자 하는 본연의 뜻을 놓치고 만다.

어떻게 하면 말씀이 전달하고자 했던 그 의미를 찾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닫혀 있지 않다.

우리에게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오직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그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