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1장 새해설
도는 마땅한 이치요, 원리요, 법칙이며, 만물을 운행하게 하는 힘이요,
자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면서 만물(인간 포함)을 계속 변화하고 생동하도록 하면서 '항상성'을 유지하는 어떠한 원리입니다.
덕은 도에 합당하게 순응하며 살아가야할 원리요, 삶입니다.
"도를 아십니까?"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道)란 보이지도 않고, 형체도 없으며, 언어로 서술할 수도 없다'고 서술합니다.
'도(道)'의 개념을 실체(substance), 본질(essence) 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는 말 그대로 '길'이라는 뜻이며, 법칙, 방법, 법도 등을 의미한다.
우리는 진리요, 길인 도(道)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비이성적 존재 혹은 힘, 에너지, 어떤 법칙인가?
아니면 노자의 말대로 명백히 존재함을 알지만, 그것을 그 무엇으로도 서술할 언어가 없는 존재자인가?
우리는 여기서 신존재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단지 유교, 불교, 도교는 신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철학적 사유이다.
그러므로 모든 초점이 인간에게 맞추어져 있다.
유교의 공자는 제자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내가 이승의 일도 다 모르는데 어떻게 저승의 일을 알겠는가?"
석가모니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했다.
인간은 그냥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즉, '영혼과 자아'라는 말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석가모니의 사상은 무신론적 철학 내지는 도덕철학이다.
석가모니는 이상이나 내세가 아니라 현실만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우주의 모든 생명체는 업에 따라서 끊임없이 윤회한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동양사상은 신존재에 대해서 무신론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니 불가지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신 존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합리적 이성의 추론으로 우주의 신비,
그 시작과 비밀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노자에게 '도(道)'를 통해 우주와 만물(자연계)이 탄생하기 전의 본질적 상태로,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원을 설명한다.
도경1장은 그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에 관한 철학적 사유의 추론으로 얻은 결론이라할 수 있다.
알 수 없으니 더 이상 그것을 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존재에 대해서 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노자의 매우 뛰어난 놀라운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비록 눈으로 볼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어도 보이지 않는 원리를 일단 도(道)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다 알 수도 없는 신비에 속한 "도(道)"는 현상계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그것은 인간이 따르고 살아가야할 원리이며 마땅히 가야할 길이 된다.
바로 그 삶은 덕(德)스러움이 된다.
"도를 모르는 자의 덕은 덕이 아니다."
도덕경 1장을 새롭게 해설하는데, 이능 ※ 대산 김석진·수산 신성수, 『주역으로 보는 도덕경-대산 노자강의』 (대학서림, 2005), 23∼28쪽 참조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다르게 혹은 다른 관점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1. 可道章(가도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도’(道)는 도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항상한 도는 아닙니다.
단지 ‘이름’(名)은 이름 지을(붙일) 수 있으나
항상 같은 이름이 아닙니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알 수 없음’(無)은 천지의 시작이라 일컫고
만물의 어머니라 말할 수 있습니다.
故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徼
고 상무욕이관기묘 상유욕이관기요
그러므로 언제나 '알 수 없음(無)'으로써
그 묘함(본체/본질)을 보고자 하고,
언제나 그 경계(가장자리/현상세계)를 보고자 함이 있습니다.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차양자동 출이이명 동위지현
이 두 가지(알 수 없음에서 탄생한 있음)는 같은 것이나,
알 수 없음에서 나와서 이름이 달리 불려집니다.
그러나 같음을 일컬어 《현(신비롭다)》하다 말합니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이것이 신비롭고 또 신비로와서 모든 묘함이 나오는 문이라고 하지요.
常 : 항상 상 始 : 처음 시 欲 : 하고자할 욕
觀 : 볼 관 妙 : 묘할 묘 徼 : 경계 요
同 : 같을 동 異 : 다를 이 謂 : 이를 위
玄 : 그윽할 현 又 : 또 우 衆 : 무리 중
제1장은 도(道)의 본체를 설명한 내용으로 『도덕경』 81장을 대표하는 글이다.
대자연 곧 만물의 신비롭고 이 커다란 이치를 딱히 무어라고 붙여 줄 이름이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표현하고 이름을 붙인다면《도(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자연(만물)의 본체(이치)가 되는 그 무엇을 굳이 이름을 붙여 그저 도(道)라고 표현을 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도(道)>라고 칭하였지만, 그 명칭을 편리상 도(道)라고 붙였을 뿐이지 그 것이 항상 변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것에 사람들이 이름을 붙였다고 해도 그것이 본래의 그것에 항상 마땅한 이름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여자)아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처녀가 되고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온 우주와 만물, 대자연의 《본체 혹은 본질》에 대해 굳이 이름을 붙여 도(道)라고 한 것 뿐이지, 그것(대자연/만물의 근원)에 온전히 부합하여 설명해 줄 수 있는 표현은 못됩니다.
어떤 이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 그에게 이름(태명)을 짓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이 그의 존재의 신비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끝임없이 변화하는 그 존재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형상도 없고, 아직 이름도 없는 본체요, 원인이 되는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하겠는가?
'오호라, 이를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꼬.'
우리가 한자를 익힐 때 유무(有無)라고 배웠는데... 그러나... 유무가 아니라 유유(有冇)였다. 잘못 알고 있었음.
수학적으로 0은 "없음"인가? 아니다. 홀로 있을 때에만 없다로 하자. 그러나 앞에 숫자가 붙는 순간 앞의 숫자의 10배가 된다. 또 뒤에 점이 붙는 순간 0이 아닌 수많은 있음이 된다.
그러므로 무(無)는 없음이 아니다. 無는 그것을 알 수 없음이다. 인간의 이성을 벗어나 존재하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有冇(있을 유, 없을 유)
有[있을 유]는 여성의 몸에 <아기가 되는 씨(육달월 肉=月·⺼)>가 자궁에 유착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 씨가 없는 상태를 冇[없을 유]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진짜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有(있는데), 無(그것을 알 수 없음), 冇(없는 것)이 아니다. 無는 있지만 알 수 없거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무(無)》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본체에 대해 이를 굳이 또 표현하자면 《무(無) : 알 수 없음》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로 有無(유무)는 '있음과 없음'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無(무)는 없음이 아니라 "알 수 없음, 무한한 가능성"을 말합니다.
無(무)는 없음이 아닙니다.
진짜 없는 것은 冇(없을 유)라고 합니다.
예를들어 "어떤 이가 나 돈 없어!"라고 할 때 지금 현재 여기에 없다는 말이지, 실제로는 그가 갑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없다'는 말이 정말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없음이지, 실제로는 어마아마한 부자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노자가 도경의 1장에서 "무(無)"라고 하는 글자를 선택한 것은 매우 적절하고 적확한 단어를 사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모두가 없음처럼 해석해 왔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단어, 익숙한 것으로 쉽게 해석하고 풀어보려고 합니다.
이런 실수는 전문가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문장과 문맥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단어에 집착했을 때 범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여러분이 "무(無)"를 '없음'과 '알 수 없음'으러 해석해 보시면 명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상태 곧 보이거나 만져지거나 그것을 알 수 있는 현상계에 나타난 형상으로 보여질 때 비로소 그것에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습니다.
그 존재에 이름이 명명되었을 때 우리는 유(有)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무(無)는 없음이 아닙니다.
단지 이성으로 "알 수 없음"입니다.
그 알 수 없음에서 천지가 시작되었고, 비로소 드러날 때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무한하고 알 수 없었는 무(無)》에서 우리들이 보고 경험하는 자연계 곧 존재하는 것들 곧 유(有)가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노자는 무(無)는 만물의 어머니라고 명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로소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인간이 깨닫게 된 도가 됩니다.
우리들이 우주의 본체(본질)를 깨닫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冇(없을 유)에서 유(有)가 나온 것이 아니라 무(無, 알 수 없음, 알지 못함)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무(無)에서 나와 존재하는 것들에는 기묘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를 알고자 함이 전정한 앎이하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 세계의 현상계에서 볼 수 있는 것,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인 유(有)는 본래 본체인 무(無)에서 나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만물의 본체인 무(無)을 아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진정한 도(道)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無, 알 수 없었던 그 본체)는 유(有)의 어머니입니다. 만물의 근원이며 본체인 무(無, 존재했지만 수 없음)에서 존재하는 모든 유(有)가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무(無)와 유(有), 이 두 가지가 사실은 한 가지이며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래의 무(無)와 유(有)는 한 가지입니다. 단지 알 수 없음(無)의 존재에서 현상계의 유(有)가 나와 다른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무(無)와 유(有)가 같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겠습니까?
이것을 또 굳이 설명하자면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로는 현(玄)이라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도덕경1장에서 현(玄)은 검다는 표현도 아니고, 그윽하다는 의미도 더 더욱 아닙니다.
無가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가졌기에 그것이 그윽하다고 하는 말은 맞습니다.
왜냐하면 그 신비로움을 인간의 이성으로 다 파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경에서 현(玄)은 우리말로 그윽하고 검다는 뜻이 아니지요.
이것은 어려서부터 천자문을 익혀서 너무나 그것이 깊게 뿌리박혀 그렇게 알고 있는 뜻으로만 해석한 표현일 뿐입니다.
그래도 無를 알 수는 없지만 신비로움을 가진
현(玄)입니다.
유有는 무無에서 나왔으니 같은 근원입니다. 無가 그 신비로움과 그윽하고 묘하기에 有에도 동일하게 신비로움과 그윽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자, 그럼 다시 해석해 볼까요? 그 신비로움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러면 덕경1장에 해당하는 부분과도 연결이 잘 되겠지요.
道는 可道나 非常道요
名은 可名이나 非常名이니
無는 名天地之始요
有는 名萬物之母라
故로 常無로 欲以觀其妙하고
常有로 欲以觀其徼하니
此兩者는 同하나 出而異名이라
同을 謂之玄하니
玄之又玄하야
衆妙之門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