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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친구네 2025. 4. 7. 21:25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부활을 믿지 못하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부활을 믿을 수 없었던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찾아오사 만나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시고 만나주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나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어떻게 찾아와 만나주십니까?

 

첫 번째로  무덤가에서 슬피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막16:9, 요20:16).

믿기는 믿지만, 먼 미래에 일어날 사건 정도로 믿는 믿음,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직도 육신적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그런 사랑,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현재적인 것, 지금 여기서 믿어야 할 믿음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에게는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주님에 대한 뜨거운 믿음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무덤을 향해 안식 후 첫날 그곳으로 달려가게 하던 힘이었습니다. 육신으로 계신 주님, 잠시라도 더 볼 수 있는 기회, 이것은 주님을 향한 막달라 마리아의 뜨거운 믿음과 사랑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부활을 믿는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랑과 열정과 믿음이 있다면 부활의 주님은 그에게 가장 먼저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의 부활을 제일 먼저 보여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면 분명히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전할 것이라고 믿어주셨습니다.

 

두  번째로 주님을 사모하며 따르던 여인들(마28:9).

당시 여성들은 증인으로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남자들만 증인으로 인정받았던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에 못 박히시던 마지막을 지킨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남자 제자들 중에 요한이 유일합니다.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고 없었지만, 여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랐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막15:40). 예수님을 장례하고 나서 무덤을 찾아 간 사람들도 여자들이었습니다.

“매우 일찍이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막16:1-3).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마28:9).

 

세 번째로는  베드로였습니다(눅24:34,고전15:5).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는 수제자의 자격이나 있습니까? 가당치도 않지요. 제자의 자격을 박탈해도 모자라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님이 기억해 주신 것은 뉘우치며 뜨거운 눈과 함께 진심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통곡하며 회개했던 제자 베드로를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수제자 베드로의 체면을 보아주신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고전15:5).

너무너무 황송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네 번째로는  예수님의 의심하며 낙심에 젖어 비통해 하며 엠마오로 내려가던 무명의 두 제자입니다(눅24:15).

이 두 사람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주님을 따르다가 십자가를 지고 못 밖혀 죽으시고 창에 찔려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는 것을 알기에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의 사건을 경험했기에 진정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믿었었는데,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도무지 믿겨지지 않아 엠마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가는 길에 한 사람이 함께 동행하려고 다가왔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슬픔과 절망으로 걸어가던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시며 예수님의 부활이 당연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를 하던 가운데 떡을 떼어 주실 때에 자기들과 동행하시던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는 부활하신 그날 저녁 두려움에 쌓여 문을 닫아걸고 함께 모였던 열 제자들이었습니다(눅24:34,요20:19).

그들은 한같이 십자가로부터 더 멀리 도망친 사람들이었고 두려움에 쌓여 문을 닫아걸고 방 안에 숨어 있던 괘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요20:19).

그들은 또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불신하던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신의도 없고 의리도 없는 사람들, 이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주님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너무나 황송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여섯 번째로는  “어떻게 부활을 믿으라는 거냐”라고 따지던 매우 현실적인 신앙의 사람 도마였습니다(요20:26).

도마는 열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하지만, 열사람이 짜고 모두 정신병자인 것처럼 취급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던 사람, "믿지 아니하겠노라"(요20:25). 그런데 주님께서는 팔일 후 의심 많은 도마에게 나타나서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황송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도마의 부류에 속하는지도 무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실 때 비로소 만져보고 나서야 믿겠다는 심보를 가진 제자는 아닐까요. 주님은 도마의 불신앙을 단번에 깨트려 주셨고, 도마는 결국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일곱 번째로는 예수님이 사라지자 제자들은 다시 그들의 고향인 북부 갈릴리 디베랴 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옛 삶으로 돌아간 일곱 제자들이었습니다(요21:1).

거기에 나다나엘,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역시 믿기 힘들었나 봅니다. 그들의 이성과 생각과 인식을 바꾸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고 만나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함께 어부였던 여섯 제자들을 데리고 ‘나는 고기 잡으러 간다’고 이 주동해서 데리고 갔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만나 제자로 불러 주셨던 그 원점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답답하고 기가 막히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이들은 여러 가지 신앙을 체험을 했어도 “당장 어떻게 먹고 살지”라며 신앙에서 세상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디모데후서 4:10)

 

그런데도 주님은 그들의 믿음 없음을 아시면서, 또 만나서 보시면서도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꾸지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스스로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고,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그들이 인격적으로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런 우리들을 찾아오십니다. 종종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지만, 우리를 결코 버린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다시 또 다시, 찾아 오사 나타나 보이시고 만나주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으니”(요21:1).

 

여덟 번째로는 오백여 형제들이었습니다(고전15:6).

분명 여기에 수많은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여성들은 빼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여성들의 인권이 없었습니다. 여성들의 증거는 증거로 인정되지도 않았었습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오백 여 형제는 당시 세상에 있던 모든 믿는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때로 한사람에게, 불신자, 의심많은 자, 배반자까지도 만나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도록 드러내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목사에게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젖먹이까지도 하나님은 당신을 신비로운 방법으로 보이시고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어린이나 지적으로 모자란다고, 혹은 믿은지 얼마 안 된다는 이유로 그들이 만난 예수님에 대한 간증을 무조건 아니라고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교회에로 모으시고 그들이 유아와 어린이로 있는 동안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어머니다운 돌봄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온 교회와 온 성도들에게 나타나셨고, 온 교회와 온 성도들을 만나 주신 것이었습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황송하고 죄송스러워 그 사랑을 무엇으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아홉 번째로 나타나시고 만나주신 사람은 예수님의 친 동생 야고보였습니다(고전15:7).

형제 야고보는 유대주의의 전통에 서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훌오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교회의 첫 번째 공의회의 의장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를 통해 야고보서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죽은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과 엘리야와 같은 믿음의 기도를 알려 주셨습니다.

 

열 번째로 나타나시고 만나주신 사람은 다시 열한 제자들이었습니다(마28:16).

장소는 갈릴리의 산에서였습니다.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열한 제자들에게 또 다시 나타나셨고 만나주셨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기 바로 전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던 초창기에 하나님은 쓰실 사람들을 볼러 주셨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만나기전에는 그들도 그러했습니다. 내 주먹을 믿는다고 사양 귀신을 믿지 말라고.

 

주님은 ‘길선주야 길선주야! 이기풍아 이기풍아!’ 라고 부르셨고, 그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불러주시고 만나주셨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셨습니다.

책망하지도, 주님께서 지금 반드시 부활하신 육체로 오셔서 우리들을 만나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도록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찾아오시는 주님, 만나시고 부활의 신앙을 갖게 하십니다.

한국교회의 영적 기둥이며 신앙의 아버지였던 인물은 길선주 장로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성령으로 오셔서 1907년 1월 15일 새벽에 역사하셨습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 모였던 수백명의 사람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부는 아직 믿지 않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자로 “이상(異狀)한 귀빈과 괴이(怪異)한 주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은 하늘이 존재이신 존귀하신 분인데도 누추한 세상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貴賓)이시고,

이같이 귀중한 분이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시고,

전능하신 분이신 데도 우리를 박절(迫切)하지 아니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시라.

그런데 그 같이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怪異)한 주인이 아니겠는가

간절히 두드리시는데도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무엇이란 말인가

굳게 문을 걸어 잠그고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 아닌가.

그리고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지르며 외쳤습니다.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은 열라. 마음의 문을 열고 존귀하신 주님을 영접하라.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님을 영접하라.”

설교를 마친 길선주 장로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때 온 회중이 갑자기 ‘아이고 아이고’ 라고 소를 지르며 통회 자복하기 시작했다.

교회당은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길장로가 죄인들을 잘 회개시키니 범죄자를 잡으려고 현장에 와 있던 순사가 회개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기독교를 트집 잡고 비판하러 왔던 중(僧)이 개종을 했다.

사경회를 구경하러 왔던 천주교 신부도 은혜 받고 감격하여 자신의 손에 있던 염주를 길선주 장로에게 주었다.

이 일은 바로 부활의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믿는 자들에게 그의 살아 계심을 증거해 주신 역사적 사건이다.

길선주 장로를 사용하셔서 당시 조선의 수 천명의 불신자들에게 그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시고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저들에게 참 믿음, 살아있는 부활의 신앙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로 쓰셔서 팔도로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당시 조선은 침몰하는 거대한 배와 같았고, 백성들은 고통과 비탄에 빠지고 절망하고 있었다.

주님은 이 땅에 거룩한 부흥을 통해 일제의 압제를,

6.25를, 배고픈 보릿고개를 넘도록 해 주셨습니다.

전 세계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게 하시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주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여러분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사 만나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부활의 신앙으로 세상의 파도를 이기며,

사망의 권세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으로 살며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