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의 설교와 회중
부지깽이가 되지 마라.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무엇일까?
그를 설교자로 만드는 그 원천은 무엇인가?
항상 "두렵고 떨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책임, 위중함을 아는가?
설교자는 언제나 <외치는 자의 소리>이어야 한다.
설교자 자신은 사라져야 한다.
이 말은 자신의 말이나 생각, 사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 것이어야 한다.
유창한 말로 설교하던 한 사람,
한 때 사람들에게 그토록 존경받던 사람이라고 해서 과연 그를 설교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설교자는 누구인가?
중보자요, 대언자요, 하나님의 사자이다.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는 바로 말씀이 있는 곳이다.
첫째, 인간이 하나님과 만남을 갖게 하는 책임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 그의 설교(말씀)와 함께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둘째,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 순수한 말씀을 선포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셋째, 설교자가 하나님 앞에서 서게 하는 설교자
그는 청중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해서 일깨워 하나님의 얼굴 앞에 나아가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입은 ‘하나님의 입’이 되어야 한다.
단순히 보냄을 받은 ‘사자’(使者)보다 더 강하고 우월할 것이다.
이는 설교자가 강단에 섰을 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연약한 한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하여도
그가 강단에서 외치고 선포하는 말씀이 성경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선포할 때에 하늘의 위엄이 나타나게 하신다.
설교는 신적(神的) 행위이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신다.”,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을 우리가 소유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은 설교라는 언어와 설교자를통해 대화하신다.
이와같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청중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신다.
로마서 10:17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듣는 것"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 진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인생들을 고쳐 주신다.
예배의 설교는 그 만남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이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인간이 직접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은총의 통로이다.
설교자의 입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설교자의 입과 그들의 입술도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설교는 그리스도는 계시가 시간과 공간 속에 선포되는 현장이다.
계시인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이 교통하는 자리이다.
말씀이 선포되는 그 자리를 사용하신다.
설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의 징표이다.
항상 우리 곁에 계신 하나님의 징표이다.
“하나님은 말씀이 선포되는 그 곳에 임재하신다.
그곳에 찾아오신다.
때로는 다양한 방법들로 여러가지 은사를 허락하신다.
설교는 브릿지이다.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결해 주는 주님의 선물이다.
그 설교가 비록 인간의 목소리로 전달되어도 "영생을 얻도록 교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게 하신다.
설교는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
성경이 설교자에 의해 선포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 된다.
설교자는 회중이 하나님을 만나는 도구가 된다.
설교는 그리스도의 현현이며, 하나님의 현현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함께 진행되는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된다.
설교자가 순수한 복음을 성령에 이끌려 전파할 때
그곳에 하나님은 실제로 임하신다. 그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며 하늘의 떡이 된다.
성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책임은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설교를 통해 먼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 바른 지식을 주어야 한다.
그 후에 그 교훈이 사람의 심령에 생생하게 접촉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설교자는 성령께서 그 설교자 자신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도구가 되도록 기도로 준비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이같이 설교를 통해 전달되는 말씀은 성도들의 마음에 심겨진다.
그 심겨진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통치 수단이 된다.
설교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이고, 또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이 된다.
비록 설교자가 한 없이 초라해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임재앞에 서 있는 것이다.
사람을 보면 실망한다.
사람들은 학벌이나 지역이나 등 여러가지를 따진다.
디셉 사람 엘리야, 농사꾼 엘리사, 목동 아모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사람들이 이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는 다시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왜 예수 자신이 생명의 떡인가? 신령한 만나, 영생의 말씀
오병이어의 표적은 젊은 청년 나사렛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正體)를 드러낸 사건이다.
출16장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난지 두 달 보름만에 신 광야에 다다랐다.
그 곳은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얻어 먹을 양식이 전혀 없는 광야였고,
여지없이 죽을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식량은 모두 동이 났다.
당연히 백성들은 지도자인 모세에게 먹을 것이 없음을 항의했다.
당연히 모세도 자기 힘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출 16:13b-14).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이슬이 사라진 뒤에는 지면에 작고 둥글고 서리같은 것이 땅에 생기도록 하셨는데,
꿀섞은 과자처럼 맛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깟씨 같이 생겼다고 했다(민 11:7).
예수는 하늘에서 내리는 양식(출 16:4) 만나를 교훈으로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너희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떡을 먹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오병이어러 먹였던 것은 내 말을 듣게 하려 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듣는다는 것은 곧 먹는다는 말이다.
육체적인 떡은 먹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적인 말씀의 떡은 듣는 것이 곧 먹는 것이다.
에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요6:30-35, 48-58)이라고 가르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보다 이적, 기적 표적 등에 더 관심이 있었고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야에 목이 매어 있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요 6:60).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말씀하신다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요 6:61).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그러나 설교자가 설교할 때는 비록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이고,
또는 대단하게 존경을 받거나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할찌라도
만일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들려 있고
그의 입에서 여전히 말씀이 선포되고
청중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이끌어 가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의 보좌를 그가 선포하는 그 말씀 가운데 두실 것이다.
그런데 듣는 자가 있고, 듣지 못하는 자가 있다.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떠나갔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고 묻는다.
그 때에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이에 예수는 대답하신다.
듣는 것에 실패한 자의 결말은 어떠한가?
결국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따라 살고 그것을 위해 죽는다.
네 가지 밭에 뿌려진 씨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씨뿌리는 비유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 6:70).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