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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를 떠받치는 두개의 기둥

친구네 2025. 2. 20. 15:09

유대교를 떠받치는 두개의 기둥 

하나는 율법이고, 또 하나는 성전이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왜곡하여 자기들의 입맛대로 바꾸었다. 

오늘날 유대인들에게 성경은 랍비들의 해석을 성경으로 여긴다. 

 - 원전인 성경을 랍비들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유대인들에게 성경과 랍비문헌은 동일한 것이다. 

또 하나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원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지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인간(세상)의 손을 빌어 지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B.C 14년부터  A.D70년까지 지었으니 약 83년에 걸쳐 지어진 건축물이다.

헤롯대왕(헤로데)은 이두매 출신으로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 9단답게 정치적으로 안정을 누리게 위해 유대인의 환심을 사는 법을 알았다. 

먼저는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종교적인 가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사람을 그의 맘대로 제사장으로 세울 수 있었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의 수는 대략 20,000명 으로 추산된다.

그들은 한꺼번에 성전 봉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24반열로 나누어 성전 봉사를 수행했다.

그러므로 한 반열에 대략 800명 정도의 제사장들이 있었고,

자기 반열의 차례가 오면 일 년에 2회 성전에 와서 직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누구인가?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히브리어 이름 '스가랴'>이다. 

'사가랴'는 히브리어 이름으로  '스가랴'라고 하며,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기억하고  계시다'란 뜻입니다.

사가랴는 경건한 자였다. 하지만, 헤롯시대에 이르러는 이런 모든 것들 깨진다.

헤롯에 의해 성직을 <매관매직>하는 경우가 생겨난 것이다.  

성경 연구는 바리새인에게, 성전제사는 사두개인들에게 속해 서로가 으르렁 거렸다. 

 

말라기2장을 보면 제사장들의 타락상을 잘 보여 준다.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5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6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7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8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9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해야할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바리새인의 가르침 

 이들 또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있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눅19:9-14)

 이 비유 또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활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는 평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 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권력을 쥐고 있었던 무리들은 헤롯왕가 중심의 <헤롯당>,

제사장계급을 형성하며 종교권력을 장악했던 <사두개파>,

모세의 율법과 선조들의 전통을 열심을 가지고 백성들의 종교생활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바리새파>,

로마제국으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열심당-젤롯당),

이러한 여러 당파들의 분쟁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세속과 격리되어 광야에서 살며 엄격한 절제와 수련생활을 했던 <에세네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예수님 당시 백성들에게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던 당파는 바로 바리새파였다.

헤롯당이나 사두개파가 비록 정치, 종교적으로 권력을 쥐고 있기는 했지만 늘 바리새파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리새파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신임을 얻고 있었고,

여론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리새파가 반대하면 헤롯당이나 사두개인들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바리새파의 동의를 얻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하기 어려웠다.

 

대제사장들, 장로들, 서기관들 중에서 선출

당시 유대인 공동체의 최고의결기구는 산헤드린공의회였는데,

대제사장은 물론 지도적인 서기관들과 장로들, 명망 있는 평신도들의 무리들을 대표하는 71명의 남자들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이 바리새인들이었다.

로마제국조차도 산헤드린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며, 특히 종교적인 결정에 대해서는 존중하였다고 한다.

 

‘바리새인’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그들의 이름처럼 <바리새인: 구별된 자>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인간들임에도 불구하고,

동족들을 정죄하고,

무슨 일이든지 종교적인 계율로 무거운 짐을 지우는 바리새인의 신앙행태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원래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살라고 주신 율법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핑계로 바리새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고,

짐지우고, 괴롭히는 율법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어떤 선한 행동이나 올바른 행실로서 선이나 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이나 관습에 의하여 규정된 율법적 의식이나 규례들을 지키는 것을 통해 의를 추구하였고,

이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죄인이라 부르며 그들을 무시하는데 앞장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자신들을 가리켜 스스로 의인이라 부르는 것을 매우 만족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예수님의 잦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과 책망이 신약성경 여러 곳에 잘 나타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내용도 바로 그것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은 일단 세리는 죄인으로 주홍글씨를 붙였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했고 하나님의 자비를 호소했다.

이런 세리의 기도는 시34:18과 시51:17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상한 심령이라. 오 하나님, 당신은 상한 심령을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세리는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았는데’ 이런 축복은 바로 바리새인이 토색, 불의, 간음을 피하고 금식과 십일조를 함으로써 얻고자 애썼던 것이었다.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곧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께 대한 현재의 태도라는 것이다.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문제는 그가 자기 생활과 자기 자신에 만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위해 하실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즉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렇게 만족하지 못할 때 언제나 소망이 있는 법이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 을 마치 흠없는 자인 것처럼 당연한 자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였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호소하였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과 만남의 자리요, 잔치의 자리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잔치가 아니라 버거운 짐으로 전략시켰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를 주는 말씀이었지만, 

바리새인들에 의해 버거운 짐으로 주어졌다. 

 

내 몸을 참된 성전으로 하나님 앞에 세우는가?

아니면 타협하고 세속회된 거짓 성전인가? 

 

나는 바리새인처럼 알량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인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호소하는 용서의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