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역설(1) 절망과 희망
“내가 하려는 몸부림을 그만두고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본문 시편 146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쓴 '찬양시'였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꿈과 소망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입에는 찬송이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고향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그 현실은 도무지 입을 다물수 없는 비극 자체였지요. 어디부터 손을 대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망연자실",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면 "하나님, 어찌 우리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라며 원망하거나, 페르시아로 "다시 돌아가자"라고 했을 것입니다.
1.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는 무너진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나라를 다시 세워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느헤미야가 1장에 기도하면서 회개한 것처럼 그들의 비극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어리석게도 우상에게로 간 범죄 때문이었지요.
하나님께서 신명기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한님의 심판이 임했고, 결국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돌아가 온전한 신앙을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했었습니다. 고생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막상 예루살렘에 도착해 보니 그들의 땅에는 사마리아 지역에 살던 이방 팔레스틴 사람들이 주인행세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 것을 환영할 수 없었습니다. 70년간 그곳에 살았으니 그들로서는 당연했지요.
유대인들이 돌아와 무너지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달가 울리 없지요.
그때부터 그들은 성벽재건부터 방해하고 모함했습니다.
그곳을 통치하던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고위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성전 건축을 방해하였습니다. 또한 상소를 올려 만일 이스라엘이 성벽을 재건하면 이스라엘이 반역할 것이고, 조세를 거부할 것이라고 당시 황제인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1세에게 고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를 일단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 때 사마리아인들은 짓고 있던 예루살렘 성벽을 훼파하고, 성문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찌할 바 모르고 눈물과 탄식만 가득했습니다.
그렇다고 맞서 싸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절망하고 낙심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며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있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방도가 없었습니다.
이때 시인은 본문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
도울 사람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라.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도와주셔서 환난에서 구원해 주시고 축복을 주신다."
이것이 어찌 보면 매우 어리석어 보이고, 어찌보면 최상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된다.
하나님만 바라보자.
그렇습니다. 절망의 시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물로 그분께 간구하며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이방땅에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B.C. 444년, 페르시아의 고위 관리였던 유대인 《느헤미야》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 간절하고 눈물로 회개하는 기도를 통해 일하셨습니다(느1장).
분담의 원리와 속전속결의 원칙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 총독으로 파견되어 자산의 신분을 감춘채 몰래 밤에 무너진 성벽을 돌아보며 상황을 파악했고, 낡이 밝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각각 성벽을 쌓을 곳을 분담하여 52일만에 무너진 성벽을 재건합니다.
계속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햐애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사 마침내
기적적으로 성벽을 완공하게 해 주셨습니다.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 소망이 반드시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때를 회상하며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한 마디로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 그 자체라서 망연자실할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람의 눈에 현실을 보니 절망이었지만, 눈을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자 희망이 생기고 소망을 생깁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우리의 희망을 하나님께 두고 소망하는 것
그것이 복(하나님과 상관관계)입니다.
시인의 결단을 보십시오.
시인이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1∼2).
왜 시인은 평생에 걸쳐,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평생토록 내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결심합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결심하고 사십니까?
둘째,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시 146:3∼4).
(그러면 누굴 의지해야 하나?)
여러분은 돈을 의지합니까?
아니면 직장을 의지합니까?
무엇을 의지하며 살고 계십니까?
셋째,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라'(시 146:5a).
시인은 누구의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으라고 말합니까?
왜 <아브라함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다윗도 아니고> 하필이면 야곱의 하나님입니까?
넷째,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b).
왜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 말합니까?
여기서 《복》은 무엇을 말합니까?
“Happy is he that hath the God of Jacob for his help, whose hope is in the LORD his God:”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146:5, 개역한글)
“אַשְׁרֵי שֶׁאֵל יַעֲקֹב בְּעֶזְרֹו שִׂבְרֹו עַל־יְהוָה אֱלֹהָיו׃”
''돌'이라는 뜻의 에벤 Eben(אֶבֶן)과 '도움(help)'이라는 뜻인 '에젤 Ezer(עָזֶר)'
에셰르(H835: אֶשֶׁר) : 행복, 복, 지복
아샤르(H833)에서 유래, '행복 happiness, 복 blessedness, 지복 bliss'을 의미한다.
에벤에셀(에세르) 등
에벤에셀 하나님!! = 도우시는 하나님!!
에벤에셀(히브리어: אבן העזר, eḇen hā -'āzer, stone of the help"도움의 돌")은 사무엘 상권에 언급된 도시의 이름이다(사무엘 상 4:1).
에벤에셀(Ebenezer, אֶבֶן הָעָזֶר)은 히브리어의 음역을 그대로 쓴 것으로, <에벤>은 '돌(stone)'이라는 뜻이고 , <에제르>는 도움(help)을 뜻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45회 나온다.
이 명사는 언제나 남성 복수 연계형 아쉬레로 나오며, '~는 복되도다(복이 있도다)' 또는 '복되도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똑바로 가다, 바르게 살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라는 의미이다.
'곧다, 솔직하다, 똑바로 가다'라는 뜻이 있다.
시편 1편의 축복은 아쉐르 אֶשֶׁר의 축복입니다.
예를 들어 '복된' 사람은 분명히 말해서,
1.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시 2:12, 시 34:8[9], 시 40:4[5], 시 84:5[6], 시 84:12[13], 시 146:5, 잠 16:20).
2. 복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의 권세, 즉 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믿고 행하는 사람(시 119:1, 시 1:2, 잠 29:18).
시 1:6 복은 여호와께서 인정하는 길을 걷는 사람에게 정해진 몫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삶의 현장에서 충실히 적용하는 사람에게 복이 약속되어 있다. 고대 성경학자 <필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올바른 행동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것은 만물의 아버지를 내 인생의 주인 삼고, 그분을 찬양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고 강조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시편 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왜(why) 시인은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으라 했을까?
야곱은 <빈손으로> 집을 떠난 인생이다.
형의 낯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간다.
20년간 봉사하고 네 명의 아내와 12 자식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가 돌아올 때는 소와 양이 떼를 이루고 여러 명의 종들도 함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야곱에게서 우리의 모습《절망》을 봅니다.
절대 절망은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죽기 내기 기도 🙏 박윤선 박사
기도, 죽기내기로 기도하라
기도는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이요 은혜의 방편입니다. 한국교회는 믿음의 선진들이 삶으로 실천하신 기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
전심전력하여 기도한 기도의 모범자들을 소개한다. 어두운 이스라엘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바꾸는 기도를 올린 한나, 환난이 주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고 기도한 요나, 하나님의 뜻을 바꾸겠다고 기도한 히스기야,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기도의 고난을 당하셨던 예수님이 그들이다. 이와 함께 청중을 향한 따끔한 충고와 위로도 잊지 않으신다. 이러한 박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도 죽기내기로 기도할 마음이 생기기를 소망한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얍복강의 기도
야곱이 물질은 부요했지만, 그의 앞에 부닥친 형을 만나야 하는데, 아무런 <희망>이 없던 인생, 절망한 한 인간의 예표이다.
그러나 얍복강에 이르러 야곱은 가족과 가축을 떼를 나누어 먼저 보내고 야곱은 홀로 남아 밤이 새도록 기도했습니다. 태양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 야곱은 변해 있었고,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응답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젯밤까지는 절대 절망, 그러나 밤새워 기도하며 절대 희망으로 비꿀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찌보면 야곱같이 《절대 절망에서 절대 희망》을 기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아브라함이 한 일《이삭을 번제로 바치려 할 때 》을 잘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삭은 어떻습니까? 이삭이 양보하고 또 양보합니다.
그러나 야곱이 한 일은 우리들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한 일도 우리는 할 수가 없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도움을 삼으며'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는 야곱이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았듯이, 너희들도 그 하나님으로 도움을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노래를 부르고 싶다면 🎶
야곱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기도하십시오.
당신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으십시오. 응답받을 때까지
당신의 마음에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