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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딜레마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과의 대화 중 겪은 충격과 당혹스러움은 여러 가지 신학적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높은 지위와 학문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에게서 들은 "거듭남"에 대한 교훈은 기존의 그의 신앙 체계와 충돌하며, 그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대의 아들, 시대의 사회적 시스템적 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통념을 깨트리는 것은 이단아로 낙인 되던 사회에서 어찌 보면 그가 속한 사회적 틀 안에서 성공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나 학문이나 기업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야에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 나가듯,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사고의 틀에 매여 있거나 전문가의 말을 전부로 여기고 추종하려는 자세는 자신의  학문적 발전에 도움이 안 됩니다. 니고데모 역시 그 시대, 유대교의 시스템 안에 있었고, 선배들의 연구를 학습하는데 진력했을 것입니다.

1. 율법에 기반한 신앙의 한계
예수 당시 사회와 유대교
유대교의 두 기둥은 율법과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신앙은 이미 부퍄가 만연하여 예수께서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말씀한 것 같이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B.C 14년 헤롯대제가 짓기 시작하여 헤롯성전이라 불리며 예수님 때에는 46년째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건물이지 예배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처소가 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 티투스에 의해 완전히 훼파될 때까지 83년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바리새인들도 도긴갸긴이었습니다. 외식하는 신앙으로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지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꼴이었으니까요.
니고데모가 사두개인들과 성전을 보면 신물이 나고, 자신이 속한 바리새파를 보면 분노가 치밀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고데모는 율법을 포기할 수 없는 기둥이었습니다. 하지만 앵무새처럼 달달 외는 율법이 자신의 영혼에 무슨 유익이 있었을 까요?
그래도 그는 자신의 고민을 드러냐 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속빈 강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율법이 아닌 새로운 대안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구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었으며, 그들의 신앙생활은 의례와 규칙을 따르는 것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하셨을 때, 니고데모는 이를 물리적으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요한복음 3:4)라는 질문에서 보듯, 그는 거듭남을 육적 차원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이 대화에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요한복음 3:5)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율법적 행위나 규칙을 넘어서서, 영적 재탄생, 즉 성령을 통한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에 의존하여 구원을 이해했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개념의 "거듭남"에 대해 당혹스러움을 느낀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 구원은 외적인 의례나 행동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하는 거듭남은 그가 익숙한 개념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정의
또한,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도 율법 중심적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물리적, 정치적 영역에 한정되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영적으로 확장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네가 볼 수 있는 육신의 왕국이 아니라, 내적 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개념은 당시 유대인의 기대와 전혀 달랐기 때문에 니고데모에게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3. 무명과의 대면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예수님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일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그를 의심하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아마도 예수님과의 만남이 자신의 명성과 사회적 지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그가 예수님을 하나의 '무명' 또는 비주류 인물로 보고 있었을 가능성도 시사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무명 랍비'에게서 전혀 새로운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결론
따라서, 니고데모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받은 충격과 당혹스러움은 그가 가지고 있던 율법 중심적인 신앙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거듭남"은 육체적 변화가 아니라 성령을 통한 영적인 재탄생을 의미하며, 이는 그가 알고 있던 전통적인 유대인의 신앙과는 다른 방향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에게 주는 이 새로운 메시지에 대해 그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