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살던 시대와 그에게 영향력을 끼친 인물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프랑스혁명(1789년부터 1799년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국민공회정치가 시작되었다. 사상적 변혁, 정치적 혼란, 통치의 과도기에 빠져 든 프랑스는 로베스피에르가 집권하면서 수많은 반대파를 숙청하는 공포정치를 펼치다가 그 역시 그가 애용하던 단두대에 처형되는 아이러니한 결말을 맞이한다. 1799년 나폴레옹에 의해 '통령 정부'가 들어서고 유럽은 전쟁에 휩싸인다.
1848/49년 독일혁명(Deutsche Revolution)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이때가 니체의 유년기였다.
니체의 가정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 10. 15~ 1900. 8. 25)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다. 아버지 <카를 빌헬름 루트비히 니체>는 1949년 36세의 나이로 뇌질환으로 사망하게 된다. 장남 니체가 겨우 5살일 때였다. 얼마 후 또 동생마저 잃게 된다. 그 후로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 엘리자베스 니체 니체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며 의존하게 된다.
1854년 나움부르크에 있는 김나지움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음악과 언어에서 특출 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슐포르타에서 1858년부터 1864년까지 학업을 하면서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해 배우면서 기독교적인 환경과 가족의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게 된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도이쎈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Burschenschaft Frankonia)의 멤버가 되었고, 한 학기가 지나자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하게 된다. 이때 그는 기독교 신앙과도 완전히 결별하기에 이른다.
그가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학우회 멤버가 되고 점차 <철학>에 심취하면서 그에게 가장 영향을 준 인물은 <쇼펜하우어>였다.
니체는 그의 저서《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커다란 영감을 얻게 되고, 음악가 바그너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러나 훗날 그를 맹비난하기도 했다.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들, 영향을 끼친 인물들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등이었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마르틴 하이데거, 미셸 푸코, 카를 융, 질 들뢰즈 등과 칼 마르크스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부정적으로는 히틀러에게는 마치 교과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여가에는 여동생 엘리자베드 니체로 인한 것이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다가 1867년 10월 군복무를 시작하여 1868년 3월 낙마로 군복무가 어렵게 되자 장기간 병가를 받는다. 186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시험과 논문 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4살 젊은 나이에 리츨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1882년 러시아 출신 정신분석학자 루 살로메에 청혼했으나, 여동생 엘리자베드의 훼방으로 두 번이나 거절당하고 만다. 결국 그는 첫사랑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깊은 실연에 빠져 고독과 방랑을 거듭하다가 1883년(40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집필하여 출판하기에 이른다.
니체가 동양사상을 동경하게 된 것은 서구 유럽의 과학과 의술의 발달, 항해술 등으로 신을 부정하고 허무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유럽의 신존재에 대한 가치관이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영국에서 칼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출산했고, 찰스 다아윈은 1859년《종의 기원에 대하여》진화론을 발표했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도전과 기독교 사상과 가치관의 붕괴로 인하여 사람들은 일대 혼란에 빠지고 허무주의가 퍼져 나갔다.
그는 이를 경계하면서 이렇게 노트에 적고 있었다.
"나는 유럽의 붓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인도의 붓다와는 대립적 존재가 될 것이다"
불교는 신비의 힘을 믿지 않고 현실에서 고통을 받아들이고 극복해 가는 힘을 가졌다고 평가했지만(불교는 기독교에 비해 백배 더 현실적이다), 그러나 불교 역시 또 다른 수동적 허무주의(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인간이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찾아서 그것에 안주하는 것)라고 말했다. 불교 역시 허무주의로 열반(느르바나: 역망의 불꽃이 꺼진 상태 곧 멸절, 소멸)을 추구하는 면에서 같은 수동적 허무주의로 보았다.
그러나 열반은 '존재의 소멸' 혹은 '최상의 행복'으로도 쓰인다. 붓다는 청중의 지적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접근하였다. 때로는 현학적으로 때로는 쉽게 비유적으로 전했다. 실제로 불교에서 열반은 자신의 현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라고 보았다. 니체가 보았던 불교는 외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니체는 사실 동양의 부처처럼, 자신이 서양의 부처가 되길 원했다.
유럽에 불교적 허무주의가 팽배하던 그때에 현실을 긍정하면서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체계를 기획하는데 영원회귀(뫼비루스의 띠와 같이 반복한다)를 주창하게 된다.
그러면 신의 존재는 허구인가?
허구적라고 단정하면 인간의 모든 가치관도 무너지게 된다. 이 세상에서의 생성소멸만 남는다. 그러므로 신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창조해 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즉, 영원회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기의 의미를 자기가 창조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새로 만들고 자기 의지로 살아가고자 하는 초인(위버멘쉬)으로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능동적 허무주의라 한다.
신이 만든 세계(선악을 규정)라고 믿고 있다가 신을 허구라고 규정하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세계(선도 아니고 악도 아님)를 보니 "힘에의 의지"로 가득 찬 세계 곧 자신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고, 더 강해지려는 충동으로 가득한 세계로 보았다. 식물도, 동물도, 사람도 살아내려는 의지가 있다.
인간은 그러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고귀한 인간은 노예가 아닌 스스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삼는다.
자기 스스로 자기완성의 길을 걷고 있으니 불교와 니체 사상은 같은 부분이 있다.
불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또한 서로 관련이 있다는 연기론 = 남의 아픔을 나와 연관시켜 불쌍히 여김 등
그러나 니체는 이 세상은 선악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힘에의 의지"로 충만하며 각각의 존재가 하위의 존재를 지배하고 먹이로 삼는 것은 자연현상일 뿐이라고 하였다.
힘에의 의지로 남을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 또한 악이 아니라 자연 현상으로 보았다. 니체에게는 보편 윤리가 부재한 인간을 지나치게 긍정하므로 인하여 공산주의 사상을 강화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사상의 위험성은 악을 악이라 규정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힘에 의지에 의해 자기의 창조로 해석하여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악의 화신을 탄생시키는 모티브가 되었다.
그의 인생의 종말
48세(1988년)에는 정신질환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였으며, 여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살다 1990년에 6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니체의 사상은 나치가 주도하는 독일의 주도적인 사상으로 활용하였고, 히틀러는 스스로 짜라투스트라가 되려 했다.
니체의 사상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성경의 패러디한 것으로 니체는 5번째 복음서라고 언급한다. 니체의 사상에 절대자를 배척하면서 자기 안에서 신과 같은 존재를 끌어내야 했습니다.
여기에서 마치 선견자와 같은 존재를 만들어야만 했던 것이지요. 바로 그래서 만들어 낸 존재가 "초인(超人, superhuman. the Ubermensch, or Superman)입니다. 마치 신과 같은 신이 필요 없는 인간이지요. 무지하거나 나약하지 않으며 한계를 뛰어넘는 뛰어난 인간, 니체는 자기 극복의 중요성을 우화로 묘사합니다.
그는 왜 "신은 죽었으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는 더 이상 없다"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려면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한 조건을 밝혀야 했습니다.
1) 나는 누구인가(Who am I?) - 초인
2)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How to live?) - 자기를 극복한 존재
3)그리고 어떻게 살다가 우아하게 죽을 것인가(How to live creatively & die gracefully?)
이처럼 초인은 기존의 전통 사회가 부여한 틀에 박힌 가짜의 외부에 존재하는 목적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로 귀결됩니다.
참된 행복이란 자신에게 부여한 목적을 이뤄나가는 방해물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합니다.
초인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가 세운 위대한 과업을 성취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과정 그 자체를 행복이라고 정의합니다.
그의 철학 세계에서는 "자기 극복의 중요성"을 우화를 통해 초인으로 표현하였고, 그동안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해 오던 전통적인 신앙을 부정해야 했기에 신은 죽었다고 신존재를 부정해야만 했던 것이지요. 그것은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는 더 이상 없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상은 신존재와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토대는 허무주의(Nihilism)였습니다.
그는 절대적인 신, 구원(행복), 진리로 대표되는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 및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고, 근대 능동적 허무주의로 더 이상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사상 속에서는 죽음을 뛰어넘어야 하기에 어디에선가 개념을 가져와야만 했지요.
그것을 깨닫게 해 주는 철인이 짜라투스트라였고, 그의 가르침을 통해 투영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합리주의의 이성은 개별성을 강조하였는데, 니체가 말하는 개인은 '해석주체'이며, '힘에의 의지'를 숭상합니다. 그가 고전문학 특히 헬라철학을 접하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어디에서 왔을까?
에베소 출신의 고대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 Ήράκλειτος, B.C 535 ~ B.C 475)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인물입니다. 그는 우주 곧 세상을 구성하는 변하지 않는 그 무엇(원질)이 '불'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우주관으로는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라고 설파했지요.
니체가 신존재를 부정하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회귀 사상은 영원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은 무한반복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질량보존의 법칙으로 본 것입니다.
'영겁회귀'(永劫回歸, Ewige Wiederkunft). 보통 '영원회귀'라고도 부르는데, 엄밀히 말하면 'The Eternal Recurrence of the Same'. 즉, 동일한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작용은 어떤 에너지에 의한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것인가?
무엇이 행복인가?
신이 없고, 내세도 없고, 그저 영원히 반복하는 세상만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내세에 대한 소망이나 위로도 없습니다. 단지 현재에 존재하는 동안에 최선의 삶을 살아내야만 합니다. 이제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삶과 가치를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능동적 허무주의'라고 합니다.
따라서 남은 것에 세상에 던져진 존재, 살아내야만 하는 실존뿐입니다. 이러한 니힐리즘(허무주의)는 신 곧《절대성의 해체》를 통한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조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계몽주의와 인간의 합리주의, 과학적 합리주의를 주창하는 이성은 "신은 죽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절대자이신 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인 실존이라고. 인간이 자신의 이성에게 신을 배격하므로 니체는 "신은 죽은 채로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버렸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Gott ist tot. Gott bleibt todt. Und wir haben ihn getodtet. Wie trosten wir uns, die Morder aller Morder?).
이러한 주장들은 결국 허무주의 심연에서 영혼을 잃어버린 자가 부르짖는 메아리입니다. 이성의 끝자락에서 터쳐나와 허공에 외치는 허무의 소리일 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진정한 어디서 삶의 이유와 행복을 찾아야 합니까?
인간의 이성이 자신의 주체가 되고 자신의 왕좌에 앉아 있건만(신을 부정하는 주체사상),
남은 것은 무엇이며(결국 자신이 왕이 되었다고 벌거벗은 임금님 처지),
또 그것으로 얻은 것은 무엇인가?(또다시 자기 상실의 늪에 빠짐)
합리적 이성으로 볼 때 기독교는 존재하지도 않는 "절대적인 신"에 매여 종노릇 한다고 여겨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면서 기독교 도덕도 함께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찾았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가야 할 방향을 잃고 말았습니다. 스스로가 "아무것도"(nihil, 無)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니체가 깨달았다는 진리를 짜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빌려 그는 예언자 행세를 할 뿐입니다.
《짜라투스트라》내용 중에서
늙은 성자가 묻는다.
"이름이 짜라투스트라라고 했던가.
그러나 그도 변했군.
그대는 자신의 타고 남은 재를 산으로 날라 갔지. 오늘은 그대의 불덩이를 골짜기로 날아가려고 하는가?
그런데 이제 잠든 사람들에게로 가서 뭘 하자는 건가.
바닷속에 있는 듯 <고독> 속에서 살았고,
그 바다가 그대를 품어주었지.
그런데도 그대는 뭍에 오르려 하는가."
짜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인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이제 나는 신을 사랑하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 테지."
짜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사랑에 대해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다만 인간들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오."
늙은 성자가 말했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말게.
차라리 그들로부터 얼마간을 빼앗아 그것을 그들과 나누어 가지도록 하게.
그래야 인간에게 더없이 큰 도움이 될 것이네.
그들로 하여금 애걸하도록 하게."
짜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자선을 베풀고 싶지는 않소,
나는 그렇게 할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오."
늙은 성자가 말했다.
"그들은 은둔자를 불신하며 우리가 선물을 주려고 왔다는 것을 믿지 않네.
왜 그대는 나처럼 곰들 속의 한 마리 곰, 새들 속의 한 마리 새로 머물고자 하지 않는가. "
짜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 늙은 성자는 숲 속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조차 듣지 못했구나."
그는 시대의 반항아인가, 문제아인가.
사람들은 시대의 천재들을 찬양하고 숭상한다.
니체는 전통을 파괴하고 뛰어넘어 급진적인 사상을 내놓는다. 종종 이러한 틀을 깨고 나온 천재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 놓은 틀은 또다시 사람들에게 새로운 틀이 되고 거기에 마취된 듯 추종하게 만든다.
종종 사람들은 그러한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며 추종하려는 성향이 있다.
예를 들면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팬터마임이 있다.
찰리 채플린이 주안공으로 등장하는 팬터마임인데,
그는 기차역에서 내리게 된다.
그리고 몇 걸음을 걷다가 작은 깃발을 들고 걷는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갑자가 몇 사람이 무작정 그의 뒤를 따른다.
채플린은 자기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보고 점점 빠르게 걷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그는 드디어 뛰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뛰기 시작한다.
무작정, 그냥 뛰고 있다.
이유를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뛰니까 그냥 뛴다.
결국 채플린은 지쳤고, 발걸음을 멈추자 모든 군중도 멈추고....
사람즐은 그에게 왜 달렸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따라와서 달렸다고 말하자.
모두거 어이없어해 한다.
군중은 앞사람이 빠르게 걸으니 그 뒤를 따랐고,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생각하고는 무작정 그 뒤를 좇아왔던 것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군중심리,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환경에 따라 휩쓸려 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모습은 누구의 모습인가?
우리들은 출판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수많은 지성인들의 고뇌로 발간된 책들, 그리고 이전에 교과서처럼 배웠던 지식들.
그것들은 과연 내가 알아야 할, 내 인생길에 등대였는가? 아니면 무작정 몇몇 사람들에 의해 추종하는 것을 나도 모르게 따랐던가?
우리들이 배웠던 지식들은 배움의 기준이 되고, 준거의 틀을 형성하여 이후로 어떤 사물이나 학문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매우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상이나 학문이 우리를 스스로 무너지게 하거나 무너뜨리거나 시력을 잃게 하거나 색안경을 쓰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책들은 쓰레기 통에 빨리 던져버릴수록 내 영혼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니체 철학의 핵심
니체 철학의 핵심이 되는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운명애 등>이다.
니체 역시 한 시대에 그러한 생각과 사유로 얻는 정신적 산물을 내놓았다. 그는 그가 살던 그 시대의 전통의 옷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려 노력했다.
그는 그 새 옷을 동양적인 사상에서 찾았다. 사고방식, 신에 대한 부정, 실존에 대한 명상 등은 동양사상이 바탕이며, 인간의 주체성을 높여 놓았다.
그 가운데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이다. 도경(상권)과 덕경(하권)은 도가철학의 집대성이다.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아 총 81장에 5,000자를 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해석의 여지도 많아 실제로 중국에서만 1,500종의 주석서가 있을 정도이다. 시조인 노자는 ‘무위(無爲)’(무위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꾸미지 않고 본연 그대로 두는 것)를 중시하였다.
니체보다 반세기 앞선 시대를 살았던 나폴레옹은 전쟁터에서 조차 그의 손에서 손자병법 놓지 않았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도덕경]은 서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동양 고전이라고 전해진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에서 18세기 하반기에《계몽주의(啓蒙時代, Age of Enlightenment)》는 프랑스를 기점으로 유럽 전역에 확산된 문화적, 철학적, 문학적, 지적 사조였다. 대표적인 철학자로 바뤼흐 스피노자, 존 로크, 피에르 벨, 아이작 뉴턴 등이 있다.
특히 볼테르의 뉴턴을 소개하면서 '뉴턴주의' 지식을 몽매(어둠)를 깨우치는 빛(계몽)으로 비유했다.
계몽주의는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실제적인 도덕을 지향하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
계몽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진보적 엘리트라고 생각하였고, 고전적이고 절대적 종교적 정치적 박해에 맞서 투쟁했다. 1760대 이후 강력해진 계몽주의 물결은 그 당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끼쳤고,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18세기말의 정치적 대격변의 배경이 되었다.
칸트(1724~1804)의 3대 비판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는 인간의 이성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순수이성 비판에서 인식론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다룬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 하던 이성주의(합리주의) 철학의 전통에서 볼 때 《이성》은 그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채, 신, 영혼불멸, 자유와 같은 무제약자들을 함부로 추구했다는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윤리학을 다룬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과연 이난의 이성이 도덕적 기준 - 행복 - 이 될 수 있는가?
미적 판단력 비판은 종교철학을 다루는데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이다.
결국 영혼불멸과 신의 현존의 요청을 통해 최고선의 실현에 대한 희망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이성이 도덕과 행복의 판단기준이므로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고 최고선에 이르는 길에 이르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계몽주의는 역시 한계를 느끼면서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고, 동양사상에서 찾게 된다. 도덕경은 서양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번역서다.
니체는 “[도덕경]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언제나 주옥같은 지혜가 흘러넘치니,
우리는 그저 원하는 대로 가져가기만 하면 된다”라고 극찬했다.
이 말에서 니체가 얼마나 동양사상에 심취하고 그의 사상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헤겔, 하이데거, 톨스토이 같은 위인들도 [도덕경]과 노자의 가르침을 접하고 감탄해마지 않았다고 하니, 서양사상의 이성의 한계에서 오는 공허를 동양사상으로 채웠다는 것을 방증(傍證)하는 것이다.
짜라투스트라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를 주인공으로 삼아 니체 자신의 철학을 풀어낸다.
그의 글들이 난해한 것은 <패러디, 수수께끼, 반어와 복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 인간에 대한 사랑은 나를 파멸시킬 테지."
독일어로 [짜라투스트라]는 동방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 마즈다교(Mazdaism) 또는 배화교(拜火敎) 창시자이다.
왜 니체는 기독교를 배격하는 사상을 만들어 내는 데에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말했을까?
니체의 사상에는 어떤 사상들이 숨겨져 있는지 살펴보자.
짜라투스트라는 나이 서른에 고향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10년 세월을 명상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가 깨달은 지혜를 세상에 설파하고자 산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짜라투스트라가 산속에서 깨달은 지혜는 다음과 같다. "신은 죽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 뿌리를 두고 인간의 삶을 채찍질해 온 지금까지의 신앙과 형이상학, 그리고 도덕은 파기되어야 한다."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아닌 것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것은 신의 섭리가 아니라 힘(에너지)과 힘의 운동이고, 이 운동으로 모든 것은 영원히 회귀하게 되어 있다.(창조론을 부정하려고, 헬라철학과 도교 사상을 서양식으로 번안하여 요약한 것이다.)
끝으로 신이 없는 세상에서 본래의 삶을 살되 먼저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 오늘의 인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인간, 곧 위버멘쉬(Ubermensch)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불교처럼 인간이 스스로 해탈하여 신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니체의 철학사상의 뿌리가 되는 핵심 주제들은 니체가 당시 기독교의 창조주와 창조와 섭리를 배격하고 헬라적인 사상과 동방종교, 불교, 도교를 혼합한 것을 주장한 것들이다.
니체는 당시의 마이어의 <에너지 보존 법칙> 같은 과학이론과 <진화론, 우주 운행의 원리> 등을 통해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던 것뿐이다.
이러한 니체의 사상과 발상은 니체가 자신 안에서 자기를 잃어버린 자신을 찾으려고 몸부린 친 흔적들로 볼 수 있다.
신존재와 창조를 인정해야 하는 이유
신의 존재와 창조를 부정하면서 인간을 아는 지식이 가능할까?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체인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의 페달이 있는 앞쪽의 톱니바퀴와 뒷바퀴는 톱니는 각각 적립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두 톱니바퀴는 체인으로 사로 연결되어 있다.
뒷바퀴에 달린 톱니바퀴가 앞에 있는 페달의 바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신지식이 우선이고, 인간을 아는 자식이 뒤에 있다. 둘은 각각 존재하지만,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신의 형상>과 <인간의 영혼>은 닮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인간 영혼 안에 신의 형상이 깃들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라는 체인으로 연결되어 있다.
신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간을 아는 지식도 그 뒤를 따른다.
자전거의 페달 바퀴 없이 자전거가 굴러가는 것은 내리막 길뿐이다.
평지나 오르막 길에는 페달바퀴가 끌고 가야만 한다. 인간이 호흡하고 살아가는 육적 생명은 마치 하나님 없이도 가능한 것처럼 보이나 인생이라는 길과 죽음이라는 오르막길은 반드시 신존재를 알아야만 이해되고 알 수 있다.
페달바퀴를 뒤로 돌리면 헛돌게 된다.
신의 작용을 후퇴시키면서 설명하면 겉돌 뿐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불가하다.